수령 300년, 완도 가리포진 역사를 간직한 산증인들

완도신문 유영인 2024. 5. 1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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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의 역사를 간직한 채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나무들을 소개합니다

[완도신문 유영인]

ⓒ 완도신문
 
주도 앞 바닷가에서 군청으로 향하다보면 군청 못 미쳐 오른편으로 경사진 길이 열려있다. 가리포진(加里浦鎭)의 객사(客舍)로 올라가는 길이다. 가리포진 객사는 정면 5칸, 측면 2칸, 맞배지붕 건물로 이중처마를 가진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목조건물(木造建物)로 완도에서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가리포진 객사는 1722년(경종 2년) 124대 가리포진 첨사(僉使)를 지낸 이형(李炯)이 창건하여 궐패를 모셔놓고 삭망마다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던 곳이다. 객사 중앙에는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초서를  집자해서 만든 청해관(淸海關) 편액이 걸려있다. 

가리포진은 1522년(중종 17)에 설치된 이후 우수영(右水營) 소속 거진(巨鎭)으로, 예하에 장흥의 회령포진(會寧浦鎭), 강진의 고금도진, 신지도진, 마도진(馬島鎭), 해남의 이진 어란진, 진도의 남도포진, 금갑도진 등 예하에 8개의 수군진을 관할하였다. 가리포진이 설치 될 당시에는 왜구들의 침탈이 빈번하였는데 가리포진의 설치는 이러한 왜구들의 침탈을 근절하기 위해 해양방어의 요충지인 가리포에 거진을 설치 한 것이다.

실제로 중종실록(1522년 5월 7일)에 의하면 병조판서 장순손이 이르기를, "남해의 미조((彌助), 여수의 방답진(防踏鎭), 강진의 가리포에 수군진성을 축조하였습니다. 이곳은 해양방어의 긴요한 요충지입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완도읍은 풍수지리상 오룡배주형(五龍杯珠形)으로 다섯 마리의 용이 주도를 떠받치는 형국이다, 그 중 한 자락인 서망산(西望山)이 주도를 향해 내려오다 바닷가에서 멈췄다.(당시에는 가리포진 객사 앞까지 바닷물이 넘나들었다)
 
ⓒ 완도신문
그리고 그 자리에 가리포진 객사가 세워졌는데 그때 가리포진을 설치하면서 심었던 느티나무와 푸조나무 각 1본이 오늘날에도 객사등(客舍嶝)에서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며 잘 살고 있다. 느티나무와 푸조나무의 수령은 대략 약 300년으로 가리포진 설치시기와 거의 맞아떨어진다.    

객사등 느티나무는 1982년 산림유전자보호림으로 지정되었는데 수고 15m 흉고둘레 2.8m로 객사 외삼문 옆에 늠름하게 서있다. 줄기는 외줄기로 정면에서 바라보면 우측으로 약간 기울었는데 3m정도를 자라다 굵은 가지가 세 개로 나누어지고 다시 여러 갈래의 가지가 어우러져 있다. 

수세는 매우 좋은 편으로 수관(樹冠)이 커서 마치 우산을 펼친 듯 멋진 외형과 함께 태풍과 같은 자연 재해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단 한차례의 외과수술도 받지 않아 관리를 잘한다면 수백년은 더 살 수 있는 멋진 나무이다. 
 
ⓒ 완도신문
이 느티나무 바로 옆에는 가리포진 객사의 외삼문(外三門)이 자리하고 있다. 

외삼문에는 가리포진 196대 첨사를 지낸 홍선이 썼다고 전하는 ″호남제일번(湖南第一番)″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첨사 홍선이 가리포진의 독진(獨鎭) 승격을 기념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의 말을 빌려 썼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8월 가리포 첨사 이정충을 대동하고 남망산에 올라 남해를 바라보며 동쪽으로는 삼도(三島, 오늘날의 거문도)로부터 서쪽으로는 노화도를 한눈에 살필 수 있다며 탄성을 자아내고 "진호남지제일요충야(眞湖南之第一要衝也. 참으로 호남제일의 전략요충지이다)"라고 어록을 남겼는데 이는 호남의 최고 군사 요충지가 가리포진성 이었음을 밝힌 것이다.

객사 뒤편으로는 완도군립도서관이 있다. 도서관 옆으로 거대한 푸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푸조나무는 수고 21m, 흉고둘레 5.6m로 거대한 몸체를 자랑하는데 1982년 외삼문 옆 느티나무와 함께 산림유전자보호림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굵은 가지가 인간들의 무지함과 개발의 미명하에 잘려나가고 수관부(樹冠部)의 가지들은 썩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피해를 많이 입어 외과 수술을 크게 받아 힘겹게 버티고 서 있다. 푸조나무는 가슴 높이에서 두 갈레로 나뉘어져 한줄기는 외줄기로 10여m를 솟은 다음 가지가 퍼졌다. 

또 한 갈레는 옆으로 퍼졌는데 전체적으로 수세가 약하고 수관(樹冠) 또한 나무의 규모에 비해 매우 초라한 편이다. 
 
 마광남 국가기능 한선기능전승자
ⓒ 완도신문
마광남(83. 완도읍 가마구미) 국가기능 한선기능전승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애릴 때 객사등 주변, 오늘날의 군청 밑 삼호그린빌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고 났는디 거그서 놀래미나 문조리(망둥어)를 낚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때 객사등 나무들이 여름이면 그라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었어요,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던 시절이라 객사등에 오르면 느티나무, 푸조나무, 팽나무, 땟밤나무(구실잣밤나무) 그늘이 그라고 시원하니 좋았는디 지금은 나무가 많이 사라진 것 같어요,″ 

″객사등의 나무는 일반적인 보통나무가 아니라 수백년 전부터 최근까지 이루어 졌던 완도의 역사를 간직한 나무인 만큼 지금 있는 나무라도 잘 보호하여 완도의 정체성을 잇는 역사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가리포진이 설치되고 수 백년 후 독진이 된 것을 기념하여 객사를 짓고 그때 심었을 나무들은  완도의 역사를 간직한 채 말없이 같은 자리에서 완도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우리 후손들이 그 나무들을 보듬고 잘 가꾸고 보존해야 할 의무를 다 해야 할 때가 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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