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전공 입학’ 시대에 문사철(文史哲) 생존기 [기자수첩]

유민지 2024. 5. 17.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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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벽 허물기'다.

지난 1월, 교육부는 각 대학별로 '무전공 입학' 정원을 대학 자율로 정해 오는 2025학년도 입시부터 선발하라고 발표했다.

정부의 재정지원금을 노리고 많은 대학들은 무전공 입학 최대치인 25%을 써냈다.

여기에 내년부터 전공의 벽을 허문다는 취지로 무전공 입학이 확대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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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024학년도 3월 모의평가. 사진공동취재단

21세기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벽 허물기’다. 기업과 정부 부처 사이의 벽부터 권위주의 학교의 벽, 수직적 조직문화의 벽 등 무너지는 벽의 종류는 다양하다. 한국 사회가 장벽을 걷어내고 통합과 융합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더 나아지는 방법이라 여기는 분위기다. 미래에 먹고 살 거리를 찾는 동력을 얻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도 있다. 

대학 전공 간의 벽도 무너졌다. ‘무전공 입학’은 통상적인 ‘선 전공 선택 후 입학’이 아니다. 무전공으로 입학하면 1학년 동안 원하는 학과를 탐색하고 2학년 때 주전공을 정한다. 그간 일부 학교에서는 ‘자유전공학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지난 1월, 교육부는 각 대학별로 ‘무전공 입학’ 정원을 대학 자율로 정해 오는 2025학년도 입시부터 선발하라고 발표했다. 사실상 강제다. 학령인구 감소로 사립대학은 이제 정부의 재정지원금이 아니면 학교를 운영할 수 없다. 학령인구 감소에 수년째 동결된 등록금으로 인해 사립대 재정의 절반은 국가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시대변화에 맞는 미래인재 양성을 위해 전공과 문‧이과 사이의 벽을 허문다”는 교육부의 제도 확대 이유가 딱히 와 닿지 않는다.

정부의 재정지원금을 노리고 많은 대학들은 무전공 입학 최대치인 25%을 써냈다. 기초학문 교수들은 일제히 언론을 통해 비판 의견을 쏟아냈다. 안 그래도 학생들이 인기학과로 쏠리는데, 여기에 무전공 제도 도입으로 정원까지 뺏기면 학과 통폐합으로 가지 않겠느냐는 이유에서다. 기초학문 교수들의 우려가 아예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학령인구 감소와 함께 소위 ‘비인기 학과’ 그 중에서도 인문대의 문사철(文史哲 문학, 역사, 철학)은 매년 통폐합 위기 속에 신입생을 기다리고 있다.

이미 경북대는 사범대학 유럽어교육학부 불어교육전공 신입생을 올해까지만 받기로 결정했다. 최근 덕성여대도 2025학년도부터 불문‧독문과 신입생을 받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무전공 입학 도입 전부터 기초학문으로 불리는 인문학은 매년 생존 위기를 겪어왔다. 여기에 내년부터 전공의 벽을 허문다는 취지로 무전공 입학이 확대되면 어떨까. 결과는 뻔하다. 인문학은 4년제 종합대학을 이루는 큰 축이지만, 실용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대학의 액세서리로 전락할 것이다.

사실 인문학의 위기는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이미 10년 전부터 숱한 우려와 걱정으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이야기가 오고갔다. 그러나 10년 전과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나. 입이 아프게 위기와 중요성을 언급했지만 현실은 놀랄 만큼 그대로다. 교육정책 최고 결정기구이자 교육 백년대계를 책임지고 있는 교육부의 혜안은 없었다.

대학별 입학 정원은 정해져 있으니, 무전공 입학 비율을 늘리기 위해선 타 전공 비율을 줄이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쯤 되니 ‘무전공 입학’에 대한 교육부의 저의가 의심된다. 진정 전공의 벽을 허물고 문‧이과 관계없는 미래 인재 양성이 목표인가. 아니면 대학 스스로 구조조정 및 학과 통폐합을 추진해 쓸모 있는 학과만 남기는 것이 목표인가 궁금하다.

“우리과 정원만은 안 된다”는 교수들의 외침을 이기적으로만 볼 수 있을까. 응용도, 융합도 본질은 기초학문이다. ‘본립도생(本立道生)’의 의미를 떠올리길 바란다.

유민지 기자 mj@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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