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어포, 산적꽂이... 욕설마저 찰진 장편소설 <문신>

김규영 2024. 5. 1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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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25년 만에 완간됐다는 윤흥길의 책, 끝까지 흥미진진하다

[김규영 기자]

윤흥길 작가의 장편소설 <문신>이 드디어 완간되었다. 구상부터 탈고까지 무려 25년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연재하던 잡지가 폐간되거나 중간에 작가 몸이 아프고 등 사연이 많았다 한다. 그만 써야한다는 생각도 했단다.

그런 작품이 드디어 나왔다. 그러나, 필생의 역작이고 새로운 고전이 될 작품이라고 하니 소심한 독자인 내게는 부담스럽다. 심각하고 무겁고 어렵고 지루하지 않을까? 책을 빌려놓고도 읽기를 망설였다. 과연 재미있을까?  
 
▲ "문신" (윤흥길, 문학동네) 제1권부터 제5권까지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 김규영
 
"북어포맨치로 짝짝 찢어서 꼬치장독에다 석삼년 장아찌 박어뿔 X!"
 
"산적꽂이를 혀서 간짓대에다 대롱대롱 매달고는 비바람 눈서리 맞혀서 얼렸다 녹였다 혀기를 슥 달 열흘 계속혀도 시연찮을 X 같으니라고!" (책 3권 102쪽)
 
읽다가 깜짝 놀랐다. 눈이 깜짝 귀가 번쩍, 속이 뻥뻥 뚫리는 욕설이다.

최근 완간된 윤흥길의 역작 <문신>(2024, 문학동네)에는 전편에 걸쳐 걸쭉하고 험한 말들이 날아다고 있지만, 관촌댁의 이 문장을 최고로 꼽겠다. 필사와 낭독은 물론, 전라북도의 억양을 듬뿍 담아 실감나게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문장이다.

상곡리 관촌댁이 뒤에 두고 온 오암리 관촌댁에게 뱉는 혼잣말에는 리듬감 넘치는 표현력 이상이 담겨 있다. 관촌 출신의 자매는 각각 상곡리 최가네와 오암리 배가네로 시집간다. 자애롭고 무던한 성품의 자매는 관촌댁이라는 택호를 사이좋게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국권피탈과 흉년 등의 어려운 시기에 아깜없이 양곡과 염려를 나누었던 돈독한 사이였다. 그랬던 관촌댁 둘이 서로를 향해 사납고 날카로운 말을 던지며 사이가 갈라지게 된 것은, 자식들의 행보 탓이다.

이종사촌 사이인 오암리의 배낙철과 상곡리의 최귀용이 어떻게 의기투합하여 나란히 옥에 갇히게 되었는지, 그들을 면회하고 나오는 두 어미가 왜 처지가 달라졌는지... 책을 따라 저자 윤흥길이 전해주는 구구절절한 사연에 푹 빠져 읽다 보면, 이런 기가 막힌 문장들에 충분히 감탄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게 된다.

예를 들어, 관촌댁의 욕설에는 여러 요리가 등장한다. 말린 북어를 손으로 찢어서 고추장 독에 깊숙이 박아 넣어 넉넉히 삼 년을 묵히면 입맛 돋우는 북어고추장장아찌가 된다. 관촌댁의 첫 문장이 바로 이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두 번째 문장에는 산적, 감, 황태 등의 음식 재료를 연상하게 하는 단어들이 등장한다. 고기, 버섯, 채소 등을 같은 크기로 손질하여 꼬치에 꿴 것이 산적이며, 간짓대는 높은 곳에 달려 있는 감 같은 과일을 손쉽게 딸 수 있도록 만든 긴 장대를 말한다. 명태를 장대에 널어놓고 겨울 찬 바람에 얼고 녹기를 반복하여 서서히 건조시켜 만든 것이 고급 식재료 황태이다.

소설 속 관촌댁은, 부엌 살림을 도맡는 사람으로서 자기 일상을 소재로 은유와 직유의 욕설을 만들고 있다.

아끼는 사람이 배부르고 맛있게 먹기를 바라며 야무지게 놀리던 손끝이 분노에 휩싸였을 때, 그 손은 무엇까지 할 수 있을까. 내 일상의 행위를 저주의 가혹 행위로 전복시키는 분노의 욕설로 이어졌다. 상곡리 관촌댁이 오암리 관촌댁에게 분노한 이유는 뭘까, 대체 어떤 시대가 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을까.
 
▲ 문신 1-5권 윤흥길 "문신"
ⓒ 김규영
  
<문신>에서 관촌댁과 그의 분노가 주요 소재가 아니다. 제목이 말해주듯 신체에 글자를 새겨넣는 문신文身이 중요하다.

전쟁이나 징용에 나가기 전에 문신을 새겨 돌아오기를 염원하면서, 혹시나 그렇지 못할 경우 추후에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도록 식별을 위한 글자를 몸에 새겨넣는 '부병자자(赴兵刺字)'라는 관습이 초반에 소개되지만, 제5권에 이를 때까지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런 주요 소재가 등장하지 않고 이야기가 감나무골 최가네 담장 안에서 맴돌고 있으니 성질 급한 독자는 읽다가 안달이 난다.

그럼에도 일단 책을 펴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태평천하>(채만식)의 윤직원 영감 뺨치게 걸고 찰지게 욕설을 뿜어내는 최명배 영감의 말만 들어도 재미날 지경인데, 특히 머슴 춘풍이와 주고받는 합은 기가 막힌다.
 
"야, 기사마(이놈)야!"
최명배는 고함을 빽 내질렀다. 그러자 안채 쪽에서 춘풍이가 우람한 덩치를 어슬렁어슬렁 드러내기 시작했다.
"으, 기사마......"
"저런 육시럴 놈이, 얻다 대고 감히 기사마여, 기사마?" 
(1권 105쪽)
 
춘풍은 어릴 때 머리를 다친 후, 조금 모자란 사람이 되었다. 최명배는 그런 춘풍을 늘 곁에 두고 집안 잡일을 시키며 부린다. 몇십년을 함께한 두 사람의 사이에는 주종관계를 넘어선 막역한 애정이 흐르고 있어, 이 광경을 주고받은 이는 두 사람을 배다른 형제로 오해할 정도였다.

모자란 춘풍의 화법은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의 전형이다. 춘풍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을 그대로 상대에게 돌려준다. 주인인 최명배 영감님이 불러도 마찬가지다. 입이 걸한 최명배는 늘 그렇듯이 춘풍을 낮추어 부르고, 춘풍 역시 늘 그렇듯이 해맑은 표정으로 주인을 똑같이 낮추어 부른다.

연령 막론하고 대부분의 감나무골 사람들도 춘풍을 춘풍이라 부르고, 그들은 춘풍을 통해 모두가 위아래없는 호칭의 세계를 산다. 최명배의 큰딸 순금만 그를 '춘복이 아저씨'라고 깍듯하게 부른다.

일제가 강점한 시기에 다들 망해버려도 제 것은 악착같이 지키려는 최명배 영감은 '국어'로 명명된 일본어를 기꺼이 사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학습을 해도 머리에 들어가지를 않아 간단한 인사말만 겨우 익혔을 따름이다. 유창하게 일어를 지껄이는 면사무소 노무계장 시라야먀 앞에서 최명배는 '이놈'이라도 써보지만, 오히려 면을 구길 뿐이다.

'국어'의 일상화를 위해 최명배는 춘풍을 '기사마야!'라고 부르지만, 해맑은 춘풍에 의해 '이놈아!'가 고스란히 자신을 부르는 이름이 되어버린다.

최명배 영감과 춘풍 혹은 신춘복씨, 그리고 순금의 관계는 소설 <문신>의 중심을 잡고 있다. 또한 여기엔 최명배의 큰아들 부용과 배우자 이연실, 순금이 의지하던 문목사와 사모, 부용과 귀용이 몸을 의탁했던 백상암의 범천스님의 이야기가 모두 이어진다.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흥미진진한 행보를 쫓다 보니 어느새 결말에 이른다.

정말 재미있다! '재미있게'만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읽고 돌아보니 곱씹어 생각할 거리가 한두 개가 아니다. '새로운 고전, 인생의 역작'이라는 광고가 과장이 아니다. 어서 <문신>의 세계로 들어오시길 권한다.

덧붙이는 글 | 개인 SNS에도 게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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