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삼쩜영] 받아쓰기 때문에 학교에 불려간 날, 울고 말았습니다

임은희 2024. 5. 15.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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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선생님... 그때 절 불러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임은희 기자]

큰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괴롭힘을 많이 당했어요.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뒤집어쓰기 일쑤였고, 어른들 눈을 피해 괴롭히는 학생들의 먹잇감이 되기도 했죠.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밀치거나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면 친구들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주의를 받고 되려 사과를 해야 하는 억울한 일도 많이 겪었어요.

초등학교 2학년으로 진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연락이 왔어요. 아이 일로 상의할 것이 있으니 학교로 올 수 있냐는 담임선생님의 전화였어요.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한숨을 쉬었죠. 학교라면 지긋지긋해서 상담도 신청하지 않는데 따로 전화해서 부른 선생님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죠.

교사 불신했던 날 울린 한 마디

"어머님, ㅇㅇ이가 받아쓰기를 하는데 팔짱을 끼고 가만히 앉아있었어요. 1번부터 10번까지 모두 불렀는데 아무것도 안 적길래 'ㅇㅇ아 받아쓰기 시험 안 볼 거야?' 하니 그제야 연필을 들고 한꺼번에 적더라고요? 문장 10개를 한 번에 다 적었답니다. 여섯 개를 맞췄지만 틀린 것들도 맞춤법이 틀린 것인지 문장을 적지 못한 것은 아니었어요."

"분명히 제 목소리를 듣고 들은 내용을 기억하는데 시험을 안 보는 것이 의아해서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기분이 나빠서 안 썼다더라고요? 반 학생들 중 누가 ㅇㅇ이 가방을 건드려서 화를 냈는데 선생님이 가방을 함부로 만진 학생은 안 혼내고 화를 낸 자신만 혼내서 기분이 나빴다고 하더라고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아이를 잘 살펴보니 다른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억울한 부분이 있어 보였어요. '이래서 속상했구나. 선생님이 미안해.' 하니 가만히 있다가 '네'하고 대답했어요."

"ㅇㅇ이의 행동은 보통 학생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잘 살펴보면 나름의 이유가 다 있더군요. 학생들은 아직 어려서 자신과 다른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고 괴롭힘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거든요. ㅇㅇ이는 아마 그런 부분들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의 저는 교사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었어요. 학생들이 제 아이를 때리거나 괴롭힐 때마다 가해 학생들의 말을 들어주며 '아이들은 다 그러면서 큰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가해'라는 표현은 나쁘니 쓰지 말라고 지적하는 교사들만 만났거든요. 어린 시절에 또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제대로 사과받지 못했던 아이는 꽤 오랫동안 소아정신과 진료를 받았지만 어떤 교사에게도 말할 수 없었어요. '문제가 있는 학생'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아이를 바라볼까 봐 걱정했어요.
 
▲ 어렵기만 했던 학교 생활 동급생들에게 크고 작은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는 아이는 학교 생활을 힘들어했지만 벗어나고 싶어 하진 않았다. 그런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교사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 임은희
 
그런데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어요. 그동안 교사들에게 쉽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어요. 아이가 받았던 풀배터리 테스트(정서, 인지, 사고, 행동습관, 생활방식 등을 측정하는 종합심리검사)결과와 행동발달사항을 말씀드렸고 도움을 요청했어요. 

"ㅇㅇ이는 재미난 질문을 많이 한답니다. 과학을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아요. 비록 쓰진 않았지만(웃음) 받아쓰기 문장 열 개를 모두 외우고 있을 만큼 기억력도 좋아요. 어머님, 3학년 겨울에 교육청에서 영재원 학생들을 모집하거든요. 거기 한번 지원해 보는 건 어떨까요? 친구를 꼭 학교에서 찾으란 법은 없으니까요."

그날 저녁,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너 오늘 받아쓰기 시험 볼 때 안 쓰고 가만히 앉아있었다며?"
"아냐! 다 썼어. 좀 늦게 쓴 거야."

"그래그래, 그런데 엄마가 학교 가서 선생님이랑 이야기하고 왔거든. 너 나중에 교육청 영재원 지원해 보라고 하시던데? 과학 좋아한다 그랬다며."
"응, 과학 실험 좋아. 나중에 써보지 뭐."

"그래, 학교에서 공문 나오면 꼭 들고 와. 알았지?"
"음...... 그러지 뭐."

시간이 흘러 3학년이 된 아이는 어느 날 꾸깃꾸깃한 종이 한 장을 내밀었어요. 서울시 ㅇㅇ교육청 영재원 학생 모집 공고였어요.  초등학교 4학년에 시작한 영재원 활동은 매년 자동진급을 하거나 시험을 통과하며 중학교 2학년까지 이어졌어요. 학교는 급식 때문에 다녔고, 영재원은 실험 때문에 다녔지만 아이의 세상은 아주 조금씩 넓어졌어요. 갑자기 교내 과학토론대회에 참여한다고 신청서를 쓰거나 친구들과 수박을 키운다며 난리를 치기도 했죠.

그럴 때마다 2학년 때 선생님을 생각했어요. 아이가 하는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다며 섣부른 판단보다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하셨던 그분을요. 아이는 이제 선생님의 얼굴이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요. 하지만 재미난 동화책을 읽어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2학년 선생님은 기억하고 있어요. 저는 가끔 안부인사를 드려요. 선물은 거절하셔서 드리지 못하지만 인사는 언제나 환영하시거든요. 은퇴하신 지 오래지만 여전히 선물보다는 이야기를 더 좋아하신답니다. 
 
이ㅁㅁ 선생님 잘 지내고 계시죠? 중학교 3학년인 아이는 올해 또 새로운 일에 도전했어요. 잘 되면 좋겠지만 안 되면 아마 또 다른 도전을 시도할 것 같아요.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갈 것이라는 선생님 말씀대로 아이는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느릿느릿 잘 크고 있습니다.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었던 2학년 교실을 가끔 생각해요. 맑은 날, 바람이 조금 불었고 창가엔 학생들이 키우는 작은 화분들이 있었어요. 저는 울고 있었고, 선생님은 괜찮다고 하셨어요. 

이후로도 많은 부침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날의 풍경을 떠올렸어요. 세상에 문장을 하나도 안 쓰다가 한 번에 썼다니까요?' 하시며 웃으시던 모습도 기억나요. 선생님, 그때 절 학교로 불러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감사한 마음 전하며 살게요. "
 
▲ 감사의 상징인 카네이션 공립학교의 경우 선생님들은 꽃 한 송이도 받지 않으시기 때문에 감사 편지를 보내는 것도 조심스럽다. 학년을 마치거나, 다른 학교 전근을 가신 후, 그리고 은퇴를 하신 후에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경우가 많다.
ⓒ 임은희
《 group 》 육아삼쩜영 : https://omn.kr/group/jaram3.0
지속가능한 가치로 아이들을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육아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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