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가느다란 선으로라도

2024. 5. 15.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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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름 작가

어쩔 수 없이 멀어진 인연들
막상 찾아와 작별 고한다면
정말 끝이라고 못박는다면

무슨 영화가 개봉했는지 체크하며 살지 않는데도 매일 SNS를 붙들고 있다 보니 그즈음 많이 회자되는 영화는 자연스레 접하게 된다. ‘패스트 라이브즈’도 나의 SNS 친구들이 많이 언급한 영화. 나중에 봐야지, 벼르던 영화를 구독 중인 OTT 플랫폼에서 딱 마주치는 건 만사를 제쳐두고 시작 버튼을 누를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 하고 12살에 헤어진 두 친구. 12년 후 미국과 한국에서 SNS로 재회했지만 연인이 되지 못한 채 다시 한 이별. 영화는 또 그로부터 12년 후 36살이 된 두 친구가 뉴욕에서 만나 며칠을 보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제야 맞이한 진짜 이별.

영화를 다 본 내 마음엔 특별한 감상이 남지 않았다. 아마도 한국계 캐나다인이면서 미국에 사는 디아스포라 감독이 과거와 과거에 두고 온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에 감응하지 못한 탓일 거다. 누군가에게 엄청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전생에 나라를 구했네!”라고 축하 인사를 건네고, 함께 사진을 찍고 싶을 때 “이것도 인연인데”라며 카메라를 드는 일이 자연스러운 나라에서 살다 보니 전생의 업이 쌓여 지금의 인연을 만들었다는 영화의 주제가 새롭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계속 생각한 건 내가 나여서 놓친 부분이 무얼지 궁금해서였다. 영화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겠다는 관객들은 무엇을 느낀 걸까. 그들도 영화 속 해성과 로라처럼 12년 전 즈음에, 24년 전 즈음에 두고 온 인연들을 가끔 떠올리며 살고 있는 걸까.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릿해지는 걸까.

나와 닮지 않은 마음들을 들여다보다 나의 기억을 뒤적여보기도 했다. 어떤 기억은 그간 잊고 지낸 게 놀라울 정도로 생생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뭔지도 모르던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남자애의 미소 띤 얼굴이 특히. 자연스레 그들의 지금이 살짝 궁금해졌다. 부모님 따라 성당에 다니던 10대 초반 시절 유독 나를 이뻐해 맛있는 걸 자주 사주던 교리 선생님은 여전히 독실하실까. 초등학교 때 단짝이었다가 중학교에 올라가며 헤어진 후 20대 중반에 잠시 어울리다 다시 연락이 끊긴 그 친구는 어디에서 뭘 하며 살고 있을까. 같이 연세대 농구부를 응원하러 다니던 그 친구들은, 대학생 때 뭘 하든 같이 놀던 그 친구는, 건조한 직장생활에 농담을 동동 띄워주던 그 동료는 지금 뭘 할까.

영화에서처럼 해성과 로라 남편의 만남도 인연이라 한다면 과거의 우리도 서로에게 인연이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현재를 공유하고 있지 않은 우리의 연은 끝이 난 걸까. 어쩌면 끝이 아닐 수도 있을까. 지금 이생도 몇십 년 후엔 패스트 라이프(전생)가 되어버릴 테고, 다음 생에 다시금 옷깃을 스치게 될 수도 있으니. 조금 더 특별한 인연을 기대해본다면 우린 또 같은 반 앞뒤에 앉아 있을 수도 있겠다.

영화에서 로라는 해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울음을 터트린다. 로라가 왜 울었는지 알고 싶어 리뷰를 몇 개 찾아봤다. 하지만 경험과 성향과 감성의 영역을 논리적으로 풀어주는 리뷰를 찾지 못해 급기야는 상상을 해보았다. 싫어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상황의 변화로 어쩔 수 없이 멀어진 인연들이 어느 날 굳이 나를 찾아와 작별을 고한다면. 우린 이제 정말 끝이고 앞으론 다시 만날 일 없을 거라고 못을 박는다면 나는 어떤 기분일까.

어차피 다시 만날 일 없던 인연들이었지만 막상 어떤 인연의 끈은 싹둑 자르려는 상상만으로도 울컥하게 됐다. 이 울컥함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선으로라도 계속 이어지고 싶은 인연이 내게도 있었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이제야 12살엔 너무 어려서 제대로 헤어지지도 못했고, 24살엔 좋아하는 마음을 누르고 헤어진 누군가가 내게 찾아와 “안녕” 작별 인사를 한다면, 나도 어쩌면 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보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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