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고양이 만든 명심"…'친명 오디션' 된 국회의장 경선 [현장에서]

정용환 2024. 5. 14.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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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선 중진들이 앞다퉈 “내가 적임자”라고 외치던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장 후보 경선 분위기가 돌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4파전 구도였던 경선 초반만 해도 후보들은 저마다 자신이 왜 국회의장감인지를 역설했다. “내가 환노위원장 때 당리당략을 버리고 초당적으로 노조법 문제를 해결했다”(추미애 당선인), “제가 국회의장 단상에 뛰어올랐을 정도로 내면은 불같은 성격”(조정식 의원)이라는 어필이 이어졌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조정식 국회의장 경선 후보가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국회의장 단일화를 논의한 뒤 건물을 나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12일을 기점으로 기류가 확 바뀌었다. 정성호 의원은 돌연 “후보직을 사퇴한다”는 짤막한 입장을 냈다. 조정식 의원은 추 당선인과 회동한 뒤 물러났다. “추 당선인이 최다선이자 연장자라는 부분을 고려했다”(조정식), “국회 관례를 존중하자”(추미애)는 ‘순한 맛’ 설명이 이어졌다. 조 의원은 이 대표 팬카페인 ‘재명이네 마을’에 “충심을 헤아려 달라”고 신고하듯 인증글도 올렸다. 이에 민주당에서조차 “호랑이라던 후보들이 갑자기 얌전한 고양이가 됐다”는 관전평이 나왔다. 경선 완주 의지를 다지고 있는 우원식 의원은 “개혁·혁신을 얘기하던 후보들이 갑자기 선수·나이·관례를 말하니까 황당하다”고 꼬집었다.

민주당은 쉬쉬하지만, 이런 식의 의장 후보 ‘교통정리’에 이재명 대표의 의중이 크게 작용했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친명을 넘어 ‘찐명’(진짜 친명)으로 불리는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조정식(5일), 정성호(6일) 의원을 차례로 찾아 후보 사퇴를 요구했다. 박 원내대표는 “제가 원내대표에 당선됐는데, 국회의장까지 친명이면 ‘친명 일색’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김용민(8일), 김민석(12일) 의원 등 다른 친명계도 경쟁하듯 추 당선인 지지를 선언했다. 이 시기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 “명심(明心)은 추미애”라는 말이 돌았던 것이 단지 우연이었을까.

추 당선인은 이 대표가 자신을 낙점했다는 분위기까지 풍겼다. 그는 13일 김어준씨 유튜브에 출연해 “이 대표가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경선이 과열되다 보니 우려가 큰 것 같다’는 말씀을 주셨다”며 “이 대표가 다른 후보에게는 그런 말을 안 했다고 한다”고 강조했다. 14일 라디오에서는 “당심이 곧 명심이고, 명심이 곧 민심”이라는 말도 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국회의장 경선이 아니라, 누가 더 친명인지를 가리는 ‘친명 오디션’ 같다”(야권 관계자)는 냉담한 반응이 나왔다.

국회의장에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이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22대 당선자 의정활동 학습모임 '한국사회, 어떻게 가야하는가?' 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공개 비판도 잇따랐다. 4·10 총선에 불출마한 우상호 민주당 의원은 “후보들이 어떤 권유를 받고 중단한 것이라면 심각한 문제”라며 “대한민국 권력 서열 2위인 국회의장을 당 대표나 원내대표가 결정하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고 총대를 멨다. 그는 “5선·6선쯤 되는 중진 의원들이 중간에 ‘드롭’하는 모양을 보면서 자괴감이 들었다”는 말도 했다.

후보로 나선 중진들을 친명계가 주저앉히는 상황에 대한 반감도 흘러나왔다. 익명을 원한 민주당 중진의원은 “민주 절차를 무시하고, 선택을 강요하는 지금 분위기가 참담하다”며 “원래 추 당선인을 뽑을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고 밝혔다. 친명계로 널리 알려진 한 의원마저 “의장은 투쟁하는 자리가 아닌데…”라며 혀를 찼다. 그러는 중에도 친명계에선 “추 당선인에게는 의장으로서, 이 대표 대신 싸워야 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이를테면 조선 시대 군역을 대신 져 주는 ‘대립군(代立軍)’ 같은 역할이다”는 말이 나온다.

국회의장은 대통령에 이은 국가 의전 서열 2위이자 3부(입법·사법·행정) 요인이다. 진영에 치우치지 말고, 의회의 중립을 지키라는 의미로 당적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명심’과 추대론만 난무하는 민주당 국회의장 경선판에서는 중립에 대한 고민도, 국회 의사봉의 무게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찾아볼 수 없는 듯하다.

민주당에서는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중진 의원) 는 현실론에 무게가 실리는 가운데, “인위적인 바람이 얼마나 멀리 가겠나”(재선 의원)는 회의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22대 전반기 국회의장을 결정지을 민주당 당선자 총회는 16일 열린다.

정용환 기자 jeong.yonghwa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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