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 폐단 응징하는 도깨비 영화 '메아리', 칸 트로피 차지할까

나원정 2024. 5. 14.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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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 韓유일 경쟁 진출
한예종 임유리 감독 ‘메아리’
126:1 경쟁률 학생단편 선정
“남성 폭력 희생 여성,
도깨비 부활” 국내 주목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중인 임유리 감독의 단편 '메아리'가 올해 제77회 칸국제영화제 '라 시네프'(학생단편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사진 칸국제영화제

술 취한 청년들에게 쫓기던 소녀가 금지된 숲으로 도망쳤다가, 몇해 전 시집간 옆집 언니를 만난다. 먼 동네 영감한테 팔려가듯 떠났던 언니는 이상하게도 여전히 새빨간 혼례복 차림이다.

14일(현지시간) 개막한 제77회 칸 국제영화제 학생단편경쟁 ‘라 시네프’ 부문에 126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초청된 임유리(26·한국예술종합학교 4학년) 감독의 단편영화 '메아리'다. 메아리는 사람을 잡아먹고 똑같이 흉내 낸다는 전설 속 도깨비다. 가부장제 폐단에 희생당한 소녀들과 도깨비의 비밀 제의가 기이하고도 아름답게 펼쳐진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중인 임유리 감독은 "자신이 아는 세상을 깨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초청 소식을 듣고 그 마음이 프랑스까지 닿은 것 같아 기뻤다"고 소감을 밝혔다. 사진 CJ문화재단, 인디스토리


초단편 습작 2편을 제외하면 ‘메아리’가 임 감독의 첫 영화제 데뷔작이다. 지난달 말 서울 중구 CJ제일제당 센터에서 만난 임 감독은 “영화의 시작은 꿈이었다. 어느 서늘한 가을, 모든 걸 포기한 소녀가 거대한 숲을 뒤로 하고 바다로 나아가는 꿈이었다. 그 해방감을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칸 영화제 측으로부터 초청 메일을 받았을 땐 "오리엔탈리즘 때문에 선정됐나"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결국 바다로 함께 나아가고 싶었던 내 마음이 닿은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메아리 전설도 임 감독이 만들었다. 메아리는 왜 그 숲에 있게 됐을까. 상상 끝에 독특한 ‘크리처’(괴물)가 탄생했다. 그는 “현실의 문제를 판타지 장르로 풀면 본질에 더 가까워진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스페인 내전을 아이 시선으로 그린 영화 ‘판의 미로’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남성 폭력 희생 여성, 도깨비 부활" 국내도 주목


단편 '메아리'에서 주인공 소녀 옥연(정은선)은 도망친 숲에서 시집갔던 옆집 언니 방울을 만나곤 이내 방울이 아니라 도깨비란 걸 깨닫는다.사진 CJ문화재단, 인디스토리
이런 독특한 세계관 덕분에 2022년 CJ문화재단 신인감독 지원사업에 선정됐다. 임 감독이 사비를 보태 단편치고는 적지 않은 제작비(2700만원)를 들였다. 영화는 지난해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 국내 영화제에서 먼저 공개됐다. 남도영화제에선 “남성 폭력에 희생된 여성들이 도깨비로 부활해 옥연(정은선)을 구한다”(허남웅 영화평론가)는 여성 연대‧해방 이야기로 주목받았다.
임 감독은 2021년 11월부터 이듬해 9월 촬영 직전까지 주변 조언을 참고해 시나리오를 17차례나 고쳐 썼다. “처음부터 페미니즘 코드로 시작한 건 아니지만, 수정해가면서 좀 더 많은 여성을 대변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강강술래 장면은 동료 학생이 ‘개인적 해방보다 함께 손잡고 나아가면 좋겠다’고 제안한 데서 착안했다. 강강술래 풍속은 관습에 억눌렸던 옛 여성들이 자유롭게 춤추며 해방감을 느낀 데서 유래했다. 그는 "원래 시나리오는 가해자 남성들이 더 잔인하게 처단되지만, 너무 자극적일 것 같아 덜어냈다"고 말했다.
단편 '메아리' 주연 배우 정은선. 임유리 감독은 "오디션에서 대부분 옥연을 분노에 찬 연기로 보여줬는데 정은선 배우만은 연약한 와중에 힘이 느껴졌다. 첫눈에 '옥연이다' 했다"고 돌이켰다. 사진 CJ문화재단, 인디스토리

‘메아리’는 김호정 촬영감독 등 스태프도 대부분 여성이다. 시나리오에 공감한 이들이 의기투합하다 보니, 조명감독을 제외하고 모두 여자였다고 한다. 가장 신경 쓴 로케이션은 도깨비가 깃든 소나무 숲. 강원도 원주 천연기념물 ‘성황림’에서 찍었다. 극중 시간 설정 때문에 해질 녘 촬영을 시작해 다음 날 일출 전까지 촬영을 했다.

한 포대 1만원 폐 한복 뒤져 단아한 의상


단편 '메아리'에는 전통 혼례복을 비롯해 다양한 전통 복식과 장식들이 등장한다. 사진 CJ문화재단, 인디스토리

이름처럼 메아리가 울리듯 설정했던 도깨비 목소리는 막상 편집하니 밋밋해서 외계인 음성 같은 독특한 효과음을 깔았다. 혼례복과 강강술래 군무 의상 등 소박한 한복은 인터넷에서 한 포대에 1만원씩 파는 폐 한복에서 골라내 시대극에 맞게 리폼했다. 애플TV+ 드라마 ‘파친코’의 한복 의상을 참고하고, 옥연의 치마는 바다 색깔에 맞췄다.
“원래 서양화과 지망생이어서 화면 구도와 예쁜 그림에 대한 집착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야 하는데, 머리카락 한올 한올까지 신경 쓴 게 지금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임 감독은 “하고픈 이야기, 사람을 그림 속에 담고 싶어서 전공을 영화로 틀었다”며 “평소 로알드 달, 에릭 칼 같은 동화작가, ‘피노키오’·‘헤라클레스’ 등 옛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다”고 했다.
'메아리'의 바다 장면은 영화 '헤어질 결심'을 촬영한 강원도 삼척 부남해변에서 찍었다. 사진 CJ문화재단, 인디스토리

칸 영화제를 위해 명함도 처음 만들었다는 그는 “CJ문화재단을 통해 멘토링을 해주신 임선애 감독(‘69세’ ‘세기말의 사랑’)한테 어떻게 하면 원하는 걸 잘 찍을 수 있는지 조언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앞서 칸 영화제에서 학생단편으로 주목받은 선배들이 대부분 연출보다는 스태프로 일하고 있어 아쉽다"면서 "저 나름대로 차기작도 준비 중이다. 최대한 더 넓게, 많은 걸 배우고 확장하며 영화를 만들어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승리호' 감독 배출한 부문…23일 '메아리' 수상할까


칸 영화제에서 올해 27년째를 맞는 ‘라 시네프’ 부문은 전세계 영화학도의 단편작품 2263편 중 ‘메아리’를 포함해 18편이 최종 진출했다. 이 부문에서 한국은 홍성훈 감독의 ‘만남’(2007)이 3등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윤대원 감독의 ‘매미’(2021)와 지난해 황혜인 감독의 ‘홀’이 2등상을 수상한 바 있다. 영화 '늑대소년'(2012), '승리호'(2021)를 연출한 조성희 감독도 단편 '남매의 집'(2009)으로 이 부문 3등상을 받았다. ‘메아리’는 22일 오후 칸 현지 상영 후, 23일 수상 여부가 발표된다.
단편 '메아리' 마지막 장면은 바다를 마주한 옥연과 거대한 숲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사진 CJ문화재단, 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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