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용배 (10) 빈민촌에 고아 출신 배달부 8명으로 개척교회 시작

신상목 2024. 5. 14.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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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신대원에 다닐 때 국민일보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나와 국민일보를 찾았다.

내가 인천에 산다고 하니 국민일보 부평 지국장을 소개해 주면서 지국장 안내를 받아 국민일보 구독자 신청을 받아오면 신청 수를 확인해 아르바이트 비용을 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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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가댁에서 과수원 판 3000만원과
전세금 1000만원까지 다 쏟아부어
무허가 집 개조해 첫 개척교회 완성
강대상 뒤 작은 방 만들어 사택 사용
인천 부개동 산동네 빈민촌에 개척한 교회 뒤쪽으로는 공동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들 요셉(앞줄 가운데)과 딸 한나(앞줄 왼쪽)와 함께한 당시 교회 출석 청소년들.


총신대 신대원에 다닐 때 국민일보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나와 국민일보를 찾았다. 내가 인천에 산다고 하니 국민일보 부평 지국장을 소개해 주면서 지국장 안내를 받아 국민일보 구독자 신청을 받아오면 신청 수를 확인해 아르바이트 비용을 준다고 했다. 지국장을 만나니 그 지역 아파트에 누가 교회 다니는 신자이고 직분이 뭔지 알려주면서 그들을 권면해 구독 신청을 받아오라 했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는 날 시간이 날 때마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국민일보 확장 요원으로 2년간 일했다.

아내는 부평 지국장 집에 세 들어 살면서 신문 배달하는 고아 출신 아이들 10여명과 지국 직원들 그리고 우리 가족 등 총 20명의 밥을 해내느라 무척 고생했다. 내가 개척교회를 하겠다고 하니 지국장님은 고아 출신 배달부 8명의 청소년을 데리고 개척하라고 해서 그 아이들의 식사를 아내가 책임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처가댁에서 과수원을 팔아 개척교회 자금 3000만원을 보내 주셨다. 지국장님은 부개동 빈민촌이 개발될 때를 기대하면서 무허가 집을 사두었는데 2500만원에 그 집을 사고 500만원으로는 교회 수리를 하라면서 수리와 건축은 집사님이 도와준다고 했다.

1991년 2월 신대원을 졸업하고 바로 부개동 빈민촌의 방 세 칸짜리 무허가 집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집을 개조하는 척하면서 교회당으로 변모시켜 나갔다. 옆집 아주머니는 교회가 들어오면 시끄러워 안 된다며 수리하는 내내 소리를 지르며 방해했다. 도중에 돈이 부족해 수리가 중단되기도 했는데 전세 살던 방 한 칸짜리 전세금 1000만원을 다 쏟아부어 마침내 교회당이 완성됐다. 예배는 절대 못 드린다고 큰소리치던 윗집에는 절대 소리 나지 않게 기도만 하겠다며 선물을 계속 갖다 주고 달랬더니 화가 누그러졌다. 당시 수리할 때 힘써주신 국민일보 부평 지국장님께 이 지면으로나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무허가 집에서 시작된 개척교회에서 고아들은 잠시 교회에 나오는가 싶더니 다 떠나가 버렸고 고향 선배 목사님으로 인천 계양구 임학동에서 목회하시는 김영진 목사님이 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장의자 네 개를 보내주셨다. 그리하여 1991년 5월 13일 부개동 빈민촌에서 드디어 개척교회를 시작하게 됐다. 아직 전도사 신분으로서 신대원 졸업한 지 4개월 만에 한마음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개척 예배 설교는 의성 철파교회 정원수 목사님이 해주셨고 동서울중앙교회 이기만 목사님도 오셔서 축복기도를 해주셨다.

주일예배에는 우리 부부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요셉과 딸 한나, 가족 네 사람이 예배를 드렸다. 강대상 뒤에 문을 내고 전기 패널 한 장 반을 깔아놓고 그곳을 사택으로 사용했다. 여름에는 비가 새고 곰팡이가 피어 옷도 책도 다 못쓰게 되었다. 빈민촌 집마다 전도지를 돌리면서 교회에 나오시라 권면했지만 사람들은 마음 문을 열지 않았다. 내가 개척한 교회에서 산 쪽으로 100m 위에 감리교회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동네 집들 사이에 묘지가 여러 개 있었고 산 능선을 넘으면 인천의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있는 곳이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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