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에 걸친 대화…'협력' 방점 찍은 韓中 외교장관
"한·중·일 정상회의 성공적 개최 위해 협력"
왕이 "간섭 배제"…협력 당부 속 美 견제구
고위급 교류 재개 물꼬…왕이 방한 초청도
역내 신냉전 기류가 굳어지는 상황에서 한중 외교 사령탑이 만나 '관계 개선'의 첫걸음을 뗐다. 양측은 '난관'이 많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협력'에 방점을 찍었다. 한·중·일 정상회의를 계기로 냉랭했던 한중관계가 전환점을 맞을지 주목된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13일(현지시간)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과 회담했다. 우리 외교부 장관이 베이징을 찾은 건 2017년 11월 강경화 당시 장관 이후 6년 반 만이다. 조 장관은 "새로운 한중 협력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속도와 규모가 아닌, 상호 신뢰 증진을 통해 지속 가능한 발전 기반을 다지는 데 공을 들여야 한다"며 "상호존중·호혜·공동이익에 기반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지속 발전시켜 나가자"고 밝혔다.
조 장관은 약 1400자 분량의 짧은 모두발언에서 '협력'이라는 단어를 일곱 차례 언급했다. 한중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거듭 부각한 것으로 보인다. '함께'라는 표현도 세 차례 썼다. 예컨대 '공동의 도전에 함께 대응하자'면서도 '양국관계 발전을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아닌 양국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출국 전 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원칙을 분명히 하되 관계 발전을 위한 모멘텀을 찾겠다"고 밝혔듯이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중국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점을 짚은 것이다.
왕이 외교부장은 비교적 명확한 어조로 한중관계의 난관을 지적했다. 왕 부장은 "중한관계 발전은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지만, 최근 어려움과 도전이 현저히 늘어났다"며 "양측의 공동 이익에 부합하지도 않고, 중국이 원한 것도 아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이 중국과 함께 양국 수교의 초심과 선린·우호의 방향, 상호 협력의 목표를 견지하길 바란다"며 "간섭을 배제한 채 마주 보고 가면서, 힘을 합쳐 중한관계의 건강하고 안정적인 발전을 추진해 나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왕 부장이 언급한 '간섭 배제'는 한미관계에 대한 경계의 뜻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중국과의 패권 경쟁을 벌이면서 공급망 재편, 인도·태평양 전략 등을 추진했고 여기에 한국을 끌어들이는 상황을 겨냥했다는 평가다. 한중관계가 얼어붙을 때마다 그 책임을 한국에 돌리는 태도는 여전했지만, 다소 완곡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표나리 국립외교원 교수는 "(왕 부장의 발언은) 기존에 중국의 입장과 같은 맥락이지만, 수위를 어느 정도 조절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협력' 강조한 조태열…"중국도 함께 노력해야"
조 장관과 왕 부장은 이날 회담과 만찬을 이어가며 4시간에 걸쳐 양국 간의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외교부 당국자는 "양측은 한중관계를 중시하면서, 이를 건강하고 성숙하게 발전시켜 나가기로 한 점을 재확인했다"며 "조만간 한국에서 개최될 제9차 한·일·중 정상회의가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도록 지속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조 장관은 '협력의 모멘텀'을 이어가기 위해 고위급을 포함한 다양한 수준에서의 전략적 교류 강화를 강조했다. 이런 차원에서 왕 부장의 한국 방문을 요청했고, 왕 부장은 양국 고위급 교류가 더 활성화되길 바란다며 편리한 시기에 방한하겠다고 화답했다.
경제적 측면에선 안정적인 공급망 관리 등 한중 간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긴밀한 소통을 지속하자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조 장관은 우리 기업의 안정적 투자를 위한 우호적 투자환경 보장과 애로사항 해소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당부했다.
조 장관은 또 북한이 역내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러시아와 불법적인 군사 협력을 지속하는 데 대한 우려를 표하는 한편,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당부했다. 아울러 탈북민 강제북송 사태에 대한 국내외 우려를 중국 측에 전달하고, 재중 탈북민이 강제로 북송되지 않고 희망하는 국가로 갈 수 있도록 각별한 관심과 협조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왕 부장은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이 건설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답을 내놨다.
고위급 교류 재개 기대…習, 연내 방한은 '난망'
양국 외교 사령탑의 만남은 그간 닫혀 있던 대화의 문을 열고 민감했던 사안들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양측이 '협력'에 방점을 찍었다고 해서 당장 한중관계에 훈풍이 불어올 것이라고 속단하긴 이르다. 한국은 앞으로도 북한에 대한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압박하는 동시에 공급망 재편 등 문제를 놓고 중국을 달래야 한다. 조 장관의 당부에 왕 부장이 화답했지만, 중국은 그간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있으면서 북한의 '뒷배' 역할을 해왔다.
그럼에도 갈등이 심화하지 않기 위한 '관계 관리'의 필요성에 양측이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한 것으로 평가된다. 왕 부장의 '초청'으로 성사된 조 장관의 이번 방중을 앞두고도 중국이 베이징에서의 외교부 장관 회담에 적극적이었다는 후문이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양국 간의 고위급 교류 재개에 탄력이 더해질지도 기대가 커지는 지점이다. 지난달 하오펑 랴오닝성 당서기가 방한했으며, 이달 말로 추진 중인 한·중·일 정상회의가 예정대로 성사될 경우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가 방한할 것으로 예상된다. 조 장관이 공식 초청한 만큼 왕 부장도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찾아 '협력의 모멘텀'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된다.
나아가 이번 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문제가 다뤄졌을지도 관심사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여러 차례 직간접적으로 시 주석의 방한을 요청했지만, 시 주석은 역으로 윤 대통령의 방중을 요청하는 식으로 응수했다. 정부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방중했으니 이제 시 주석이 오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느냐"라면서도 "시 주석이 내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방한하는 데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라 연내 별도 방한 일정을 잡긴 어렵다고 보는 분위기도 있다"고 전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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