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널티’ 없는 ‘세련된 방식’? 김빠진 증시 밸류업…무엇이 문제인가

명순영 매경이코노미 기자(msy@mk.co.kr) 2024. 5. 13.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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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동료 압박)가 기업 밸류업(가치 제고)을 이끌 겁니다.”

지난 5월 2일 금융당국이 밸류업 가이드라인을 발표하자, 한 관계자가 페널티 없는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던졌다. 그러자 정부 관계자는 “건전한 경쟁으로 기업의 자발적인 변화를 유도하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시장의 ‘피어 프레셔’에 대한 판단은 정부와는 크게 다른 것 같다. 정부는 ‘페널티’가 아닌 ‘세련된’ 방식을 강조하지만 증권가에서는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한 회의감과 실망이 넘친다. 강제적인 규제나 세제 혜택이 없다는 점을 가장 큰 문제로 삼는다.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5월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기업 밸류업 지원 방안 2차 세미나에 앞서 인사말하고 있다. (한국거래소 제공)
강제성 없는 밸류업에 증시 실망

비재무지표까지 공시 권고했지만…

정부가 공개한 밸류업 공시 가이드라인은 자율성에 방점이 찍혔다. 기업 자율성을 존중하되 시장 내 견제 장치를 통해 실질적인 동참을 유도한다는 구상이다.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 2차 세미나’에서 “상장 회사 스스로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수립·이행하며 시장과 소통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기업에 제대로 된 시장 평가와 투자 유도가 이뤄지도록 자본 시장의 선순환을 구축하고자 한다”고 했다.

정부의 밸류업 키워드는 ▲자율성 ▲미래 지향성 ▲종합성 ▲선택과 집중 ▲이사회 책임 등이다. 기업은 각자 핵심 지표를 선정해 중장기 목표를 수립하고 사업 부문별 투자와 연구개발(R&D) 확대, 사업 포트폴리오 개편, 자사주 소각·배당, 비효율적인 자산 처분 등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정부는 기업 현황과 특성에 맞게 자유롭게 공시하도록 제약을 두지 않았다. 5월 중 가이드라인이 확정되면 준비되는 상장사들부터 연 1회 자율적으로 공시한다. 공시 시점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예고 공시도 가능하다. 여타 기업 공시와 마찬가지로 수정·보완이 필요한 경우 정정 공시를 하면 된다. 외국인 투자자를 위한 영문 공시 병행이 권장된다.

미래에 초점을 맞춘 밸류업 공시는 이미 발생·결정한 내용인 기존 공시와는 성격이 다르다. 사업보고서 등 여러 공시에 산재된 정보를 기업가치 제고에 초점을 두고 재구성해야 한다. 주주환원 정책과 지배구조, 주가순자산비율(PBR)·자기자본이익률(ROE) 등 지표를 종합적으로 공개해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한 목표와 계획을 알리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밸류업 공시에 담길 기업 개요에는 업종, 제품·서비스, 재무 실적 등을 포함시켜 투자자가 밸류업 공시 보고서만 보더라도 기업 현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국내외 시장 여건, 기업 경쟁력, 기업이 속한 산업 특성과 성장 단계 등을 반영한다.

비재무지표를 담아야 한다는 점은 기존 공시와 다른 특징이다. 비재무지표는 일반주주 권익과 관련된 기업 지배구조, 이사회 책임성, 감사 독립성 등을 아우른다.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의 분리 여부, 독립적인 내부감사부서 여부를 비롯해 환경, 사회적 책임 등 기업가치에 중요한 기준을 담을 수 있다.

목표와 계획 수립 시, 계량화된 수치를 권장한다. 다만 명료하게 제시하기 어렵다면 정성적인 서술로 대체할 수 있다. 가령 ‘2025년부터 2027년까지 ROE 10%를 달성하겠다’는 식이다. 급격한 경영 환경 변화로 목표 변경이 필요하면 정정 공시를 통해 수정하고, 이후 달성 수준과 이행 여부를 자체 평가한다. 특히 시장과 소통 과정에서 이사회의 적극적인 참여도 권고한다.

앙꼬 빠졌다는 평가 주류

세제 혜택 어디로…법 개정 난관

정부 2차 가이드라인 발표날인 5월 2일, 이른바 밸류업 관련주는 모두 주가가 빠졌다. 현대차(-0.8%), KB금융(-4.37%), 신한지주(-1.82%), 하나금융지주(-2.9%), 메리츠금융지주(-0.88%) 등이 내렸다. 이날 신차 ‘더 뉴 EV6’의 첫 티저 이미지를 공개해 호평받은 기아(1.36%)만 거의 유일하게 빨간불을 켰다. 1차 가이드라인 공개 당시 국내 주식을 1200억원 가까이 사들이던 외국인은 이날 27억원 순매수에 그쳤다. 정부안이 두루뭉술하고 구체적인 혜택이나 규제가 없는, ‘맹탕’ 정책이라는 평가 때문이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4월 말 “배당, 자사주 소각 등 주주환원 노력이 증가한 기업에 대해 법인세 세액공제를 도입하고 배당 확대 기업 주주의 배당소득에 대해선 분리 과세를 추진하겠다”며 세제 인센티브를 언급했다. 밸류업 프로그램 성패가 기업들의 참여도에 달린 만큼, 기업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법인세와 배당소득세 인하안을 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2차 발표에서 구체적인 세제 혜택안은 없었다. 증권가에선 세제와 관련된 인센티브가 확정되지 않으면 강한 상승세가 나타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문제는 시장이 기대하는 세제 지원 방안을 현실화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데 있다. 기재부가 추진 중이라고 밝힌 법인세, 배당세 혜택은 법 개정 사안이다. 정부안을 발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국회로 가져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대기업 감세’라는 이유로 야당이 반대할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정부 내에서 감면 수준, 발표 시기, 발표 주체 등에 대해 논의 중이다. 금융당국이 최종안을 내놓기로 한 5월 중 세제 혜택안이 나오기 어렵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가 세제 지원 방안을 내놓더라도 현실화 논의는 9월 정기국회 때나 가능할 전망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통상 세법 관련 논의는 임시국회가 아닌 정기국회에서 이뤄지는 만큼 실제 시행까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여당이 총선에서 패한 이후 세제 인센티브,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등 정책 동력이 약화해 ‘밸류업’도 힘을 잃었다는 의견이 나온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혜택이 없다면 상장사 공시 부담만 늘리는 꼴”이라며 “연초에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증시가 움직였지만 향후 구체적인 혜택이 없다면 증시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김지현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정책 불확실성이 부각되며 PBR이 낮은 종목들이 1~2월 상승폭을 반납했고, PBR도 연초 수준으로 회귀했다”며 “세제 인센티브가 확정되지 않으면 연초와 같은 강한 상승세가 나타나기 어렵다”고 예상했다.

외국인은 반년째 매수세…기대감 담겼나

한국거래소 역할 강화 목소리도

한국은 주가를 끌어올려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무엇보다 너무 싸다. 국내 증시를 대표하는 코스피200의 PBR이 대부분의 선진국은 물론 신흥국보다 크게 낮다.

한국거래소 ‘유가증권 시장과 해외 주요 시장 투자지표 비교’에 따르면, 2023년 결산 재무제표를 반영한 코스피200의 PBR은 1이다. 선진국(미국·일본 등 23개국) 평균인 3.2보다 낮다. 심지어 신흥국(중국·인도 등 24개국) 평균인 1.7에도 못 미쳤다. 코스피200의 주가수익비율(PER)은 21.2로 15.2인 신흥국보다는 높고 20.9인 선진국과는 유사했다.

물론 밸류업 기대감이 사라진 건 아니다. 특히 외국인은 저평가주를 사들이며 K증시의 레벨업 가능성을 엿보는 중이다.

지난 4월 외국인은 국내 주식 시장에서 2조6000억원을 순매수해 6개월 연속 순매수했다. 금융감독원 ‘4월 외국인 증권 투자 동향’에 따르면 올해 4월 외국인은 상장 주식 2조6260억원을 순매수해 802조5000억원을 보유 중이다. 전체 시가총액의 28.9% 수준이다. 외국인은 코스닥에서는 1조원대 순매도를 기록했지만 저평가 기업이 포진한 유가증권(코스피) 시장에서 3조6490억원 순매수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순매수세다.

올해 들어서도 매수세는 이어졌다. 외국인이 5월 7일까지 유가증권 시장에서 사들인 주식 순매수 규모는 총 20조원이 훌쩍 넘는다. 연간 기준으로 2009년(32조3864억원), 2010년(21조5731억원) 이후 역대 세 번째다. 외국인은 올 들어 매달 매수 우위 행진을 이어가면서 규모를 계속 키우고 있다.

노동길 신한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외국인이 최근 정부 밸류업 프로그램에 실망을 표출했지만 추가 정책 강도에 따라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며 “주주환원을 손금에 산입하거나 배당소득을 주주 대상으로 분리 과세하는 법을 제정해야 기업의 실제적인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외국인들이 한국 시장을 더 매력적으로 느끼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린다. 미국 운용사인 앰플리파이의 크리스티안 마군 최고경영자(CEO)는 “한국이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지수에서 신흥국으로 분류되는 것은 산업과 인프라, 세계적 브랜드 등을 고려했을 때 모욕적”이라며 “미국 투자자들이 한국을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는 만큼 조금 더 능동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강조했다.

밸류업 이행과 관련해 강제성이 없다 보니 소액주주 이익을 높일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가령 상법상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개정하는 것도 한 방안이다. 관련해 재계가 우려하는 부분이 있지만 반대급부로 경영권 보호 장치를 도입하면 된다. 포이즌필과 같은 경영권 보호 장치를 도입하면 대주주도 경영권 위협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밸류업에 동참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다는 의견이다.

한국거래소 역할 강화도 해법으로 제시된다. 일본이 벤치마킹 사례다. 도쿄증권거래소는 기업에 자본 비용과 주가를 고려한 경영 계획을 공시하라고 요구하고, 상장 유지 기준을 대폭 강화했다. ‘상장했으니 끝’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기업가치가 오른다는 판단에서다. 실제 도쿄거래소는 개편에 나선 지 2년 만에 최상위 시장인 ‘프라임 시장’ 상장사 20%를 하위 시장으로 퇴출했다. 반대로 ‘프라임 시장’에 유지하는 기업은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지고 기업 신용등급 산정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등 자금 조달이 유리해지는 인센티브를 줬다.

외국계 행동주의펀드 역할을 기대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밸류업 프로그램으로 주가를 크게 끌어올린 일본도 ‘자율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일본 행동주의펀드는 ‘자율’을 ‘강제’로 바꿨다. 일본 행동주의펀드는 일본식 밸류업에 협조하라는 주주제안을 하거나 ROE 등 재무지표가 낮은 기업의 대표이사 선임을 반대하고 나섰다. 버블 경제 시절, 야쿠자 취급까지 받았던 행동주의펀드는 이제 정부기관에 자문역으로 협력하고 각종 지원금까지 기부하며 밸류업 파트너로 인정받는다.

대신증권은 PBR이 낮으면서 ROE와 실적 개선세가 뚜렷한 업종으로 수혜주가 압축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경민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금융, 자동차, 지주사는 주가가 조정됐지만 여전히 담아둘 만하다”며 “주주환원 여력이 높은 만큼 장기 투자 시에는 전고점을 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9호 (2024.05.15~2024.05.2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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