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은 100가지, 1000가지 이야기 있는 곳 모든 지역에 로컬매거진 있어야”

김남중 2024. 5. 13.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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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가] 창간 10주년 맞은 제주 잡지‘iiin’ 고선영 발행인
제주도 로컬 매거진 'iiin' 발행인인 고선영씨가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인터뷰를 하며 최근에 나온 41호 잡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한형 기자


2014년 봄에 제주도에 한 잡지가 등장했다. 1년에 네 번 제주도 이야기를 전하는 ‘iiin(인)’이라는 잡지다. 이 잡지가 지난달 창간 10주년을 맞아 41호를 발행했다. 로컬 매거진 시대를 연 잡지이자 전국에서 읽히는 유일한 로컬 매거진이다.

고선영(49)은 2011년 제주도 서귀포시로 이사해서 여행책을 쓰며 지내다가 잡지를 창간했다. 지난 2일 서울 영등포구 국민일보에서 만난 그는 “여행잡지 기자로 일하면서 해외 여행을 많이 다녔다. 한 달에 다섯 번 해외 출장을 간 적도 있다. 몇 년을 그런 생활을 하다 보니 몸이 안 좋아지더라. 갑자기 코피가 나기도 하고.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사표를 내고 남편과 함께 서귀포로 내려갔다”고 말했다.

제주도에서 그는 ‘소도시 여행의 로망’ ‘제주 여행의 달인’ ‘당신에게 제주’ 등의 책을 썼다. 그는 화려한 대도시나 이름난 휴양지 대신 사람들이 오래 살아온 작은 마을 이야기를 좋아했다. 마침 ‘골목 여행’이나 ‘로컬 여행’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꽤 성공한 여행작가로 변신한 그가 잡지 창간에 나선 건 ‘제주도 관광객 1000만명 돌파’라는 사건 때문이었다.

“2013년 연말에 제주 관광객이 처음으로 1000만명을 돌파했다. 여행기자였으니까 1000만명이 얼마나 대단한 숫자인지 안다. 같은 해에 미국 하와이와 일본 오키나와 관광객이 각각 800만명, 850만명이었다. 관광객이 1000만명이나 오는데, 제주도에 대해 얘기하는 잡지가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외국에 가면 어떤 호텔에 가더라도 침대 머리맡에 그 지역 매거진이 있는데 한국에는 제주도에도 그런 잡지가 없다는 게 마음이 쓰였다.”

누군가 잡지를 만들어주길 바랐지만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초조해진 그는 힘들어서 도망쳐 나온 잡지로 다시 뛰어들었다. 혼자 기사를 쓰고, 포토그래퍼 출신인 남편이 사진을 찍었다. 친한 디자이너가 합류했다. 그렇게 셋이서 100페이지 분량의 첫 잡지를 만들었는데, 이 잡지의 초판 1만부가 3주 만에 다 팔렸다. 그는 “제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구나, 제주도 콘텐츠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구나, 그걸 확인했다. 그래서 잡지를 계속 만들게 됐다”고 얘기했다.

‘iiin’은 매호 하나의 제주도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번에 나온 41호 잡지의 주제는 ‘Super Jeju’로 제주도에 있는 오래된 슈퍼마켓들을 소개했다. 고선영은 ‘iiin’을 제주 콘텐츠의 발굴자라고 본다. 그래서 많이 알려져 있거나 유행하는 콘텐츠를 반복하는 대신 새로운 소재를 찾고, 같은 소재라도 다르게 접근함으로써 새로운 제주도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는 “우리는 줄 서서 먹는 맛집이나 신상 카페를 다루지 않는다. 우리는 독자들에게 제주도에서 뭐가 궁금한지 물어보지도 않는다”면서 “독자들이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들어봐, 재미있을 거야, 하면서 말해주는 게 우리의 태도다”라고 설명했다.

‘iiin’은 전국으로 유통된다. 제주도 외 지역에서 팔리는 부수가 절반쯤 된다. 근래 전국 곳곳에서 로컬 매거진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콘텐츠, 디자인, 유통 등에서 ‘iiin’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한 사례는 아직 없다.

‘iiin’은 제주 콘텐츠를 발굴하고 아카이빙하면서 지역이 재미있고 수준높은 콘텐츠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고선영은 “지역은 100가지, 1000가지 저마다의 재미와 이야기가 있는 곳”이라며 “우리나라 모든 지역에 로컬 매거진이 하나씩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역에는 콘텐츠가 널려 있다. 지역이 쌓아놓은 엄청난 시간의 지층 속에 굉장한 경쟁력을 가진 콘텐츠가 묻혀 있다. 그걸 발견해서 비즈니스를 만들 수도 있다.”

그는 10년 동안 제주도를 다뤘는데 앞으로도 할 얘기가 남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고 한다. 그때마다 “소재가 떨어질 일은 없다. 하면 할수록 할 얘기가 더 생겨난다. 콘텐츠가 없다고 하는 건 발굴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답한다. 제주도라서 재미있는 콘텐츠가 많은 것 아니냐는 질문도 많다. 그는 “‘노잼 도시’(재미없는 도시)라고 불리는 곳에도 콘텐츠가 없는 게 아니다. 예컨대, 대전이 진짜 노잼 도시일까? 그 지역의 콘텐츠가 발굴되지 않았을 뿐이다”라며 “교통편이 나쁜 곳일수록 지역성이 많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지난 10년간 발행된 'iiin'의 표지들. 재주상회 제공


‘iiin’은 계절마다 차이가 있지만 매호 평균 1만부를 발행한다. 한 권의 정가는 6900원. 판매처에 공급하는 가격은 이보다 낮기 때문에 잡지가 다 팔려도 매호 5000만원쯤 들어가는 제작비를 회수하긴 어렵다. 광고도 싣지 않는다. 그럼에도 셋이서 잡지사로 출발한 콘텐츠그룹 재주상회는 10년 만에 직원 15명이 일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이 회사는 로컬 콘텐츠를 발굴하고 이를 사업화한다. 복합문화공간 ‘사계생활’, 제주 식문화 워크숍 공간 ‘사계부엌’, 제주에서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숍 등을 운영하고 있다. 2021년에는 제주도의 사라진 명품 니트 브랜드 ‘한림수직’을 부활시킨 작업으로 주목을 받았다. 잡지에서 한림수직 이야기를 소개한 뒤 이 회사를 되살리기로 한 것이다. 제주의 양털을 사용하고 전통적인 수공예 기술로 짜내는 한림수직의 니트를 거의 20년 만에 복원했고, 해마다 생산량과 품목을 늘려나가는 중이다. 지난해에는 세계 최대의 디자인 축제인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 초청받아 제주의 돌담을 닮은 스툴 제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회사의 로컬 콘텐츠 개발 경험에 주목한 기업과 정부, 지방자치단체의 협업이나 컨설팅 요청도 이어지고 있다.

고선영은 “처음엔 잡지사로 시작했고, 제주 기반의 로컬 큐레이션 기업이었다가, 지금은 로컬 라이프스타일 기반의 콘텐츠 디벨로퍼라고 우리 회사를 소개한다”면서 “매거진은 우리에게 핵심이 되는 비즈니스다. 가장 새로운 것은 지역 안에 있고, 그걸 발굴하는 게 매거진이다. 그렇게 찾아낸 콘텐츠를 바탕으로 공간, F&B(식음료), 상품 등 다양한 오프라인 제품으로 만들어간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방을 살리는 힘도 로컬 콘텐츠에서 나올 수 있다고 믿는다. “새로운 콘텐츠가 발굴되고 거기서 새로운 공간이나 제품, 서비스가 만들어지면 누군가 그걸 보러 온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결국 콘텐츠인 거 같다. 즐거운 콘텐츠, 재미있는 콘텐츠가 있다면 가보고 싶고 살고 싶어진다. 맨날 소멸만 얘기하는 지역이라면 누가 오고 싶겠는가. 그래서 로컬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이 지역에 필요하다.”

그는 “지역은 블루오션”이라며 “빨리 지역으로 가서 기회를 발견하라”고 권했다. 또 “지방 대학에서 지역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지방 대학들에서 지역을 가르쳐주면 청년들의 다양한 시도가 나타날 수 있다. 청년이 지역에 남아 있으면 실패자인 양 취급하는데, 청년들이 지역에서 창업을 하고 비즈니스를 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도와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방이 없어질 것이다.”

제주도에서 시작된 잡지 ‘iin’은 10주년을 맞아 연 2회 발행하는 반년지로 개편하는 한편 해외로 진출한다. 고선영은 “해마다 200만명 넘는 외국인들이 제주도를 방문하고, 외국에 가보면 제주도에 가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면서 “제주도에는 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가 진짜 많다. 그동안 기록한 제주 이야기를 선별해 해마다 영문판 단행본을 만들어 해외에서 판매하려고 한다”고 얘기했다.

1, 2년 정도 쉬려고 내려온 고선영의 제주 생활은 로컬 콘텐츠라는 세계를 발견한 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다. 로컬 매거진 ‘iin’과 로컬 콘텐츠 회사 재주상회, 그리고 로컬 크리에이터 고선영이 보내온 10년은 지역이 품고 있는 힘과 가능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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