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용배 (9) 서울살이 시작하며 생활고에 공부 틈틈이 아르바이트

신상목 2024. 5. 13.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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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3월 결혼하고 처음 두 달간은 몹시 갈등했지만 목회자의 소명에 순종하고 성경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니 그때부터 아내는 고분고분해졌다.

하나님의 부르심 과정에 아내가 쓰임을 받은 것이다.

나는 오로지 공부와 교회 전도사 사역에 몰두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숙제로 받은 과제물은 너무 많았고 힘겨운 학창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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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신대원에 들어가며 서울 이사
고물 수집, 공사장 일, 교회 사역 등
가족 부양과 학비 벌기 위해 고군분투
아내도 여성복 장식 삯바느질로 도와
박용배 목사를 사위 삼고 신학교에 보내고 목회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는 장모 김쌍금(왼쪽) 전도사는 현재 88세의 나이에도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1년 3월 결혼하고 처음 두 달간은 몹시 갈등했지만 목회자의 소명에 순종하고 성경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니 그때부터 아내는 고분고분해졌다. 하나님의 부르심 과정에 아내가 쓰임을 받은 것이다. 나는 오로지 공부와 교회 전도사 사역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오기로 시작했지만 그 모든 갈등과 어려움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임을 깨닫게 됐다.

총신대 신대원에 들어가면서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사 왔다. 서울 면목동 동서울중앙교회 이기만 목사님과 장인이 친척이어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하게 된 것이다. 처가댁에서 750만원을 전세자금으로 도와주셨다. 8월 한창 무더운 폭염 가운데 이사 왔는데 1만원짜리 중고 냉장고를 들여놓았더니, 냉장고 문이 닫히질 않아 고무줄로 둘러놓고 사용했다.

아내는 여성복 앞부분에 반짝이는 장식을 바느질하는 일을 하면서 할부로 전화기 한 대를 들여놓았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는 공사장에서 일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아들 요셉은 다섯 살, 딸 한나는 세 살이라 교회 선교원에 다녔다. 시골 촌사람인 신학생이 가족과 함께 서울 생활하면서 제일 어려운 문제는 경제적인 것이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교회 사역과 공부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교회 전도사였던 선배가 면목5동에 개척교회를 시작했는데 40일 금식기도 후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기도원에 머물고 있었고, 그의 가족과 친인척 15명 정도가 모이고 있었다. 목사님이 언제 회복될지 모르니 나에게 당분간 전도사로 시무해달라고 했다. 나는 교회를 섬기면서 경기도 양지 총신대 신대원에서 공부했다. 주중 나흘은 양지에서 공부하고 토요일과 주일에는 교회 사역을 했다. 월요일에는 고물상 손수레를 빌려 강냉이 몇 자루를 싣고 고물을 거두러 다녔다. 종일 빈 박스와 빈 병을 줍고 골목을 돌아다니며 고물을 수집해 학비를 모았다.

방학 때는 중곡동 신축건물 공사장에서 막노동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성도들이 10명 정도 모이는 교회이다 보니 생활비를 제대로 받을 수 없었고 아들 요셉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1년간 교회를 섬겼는데 목사님의 건강이 조금 회복돼 다시 시무하겠다 해서 교회를 나오게 됐다.

총신대학원 2학년인 1989년 여름 동창 전도사님의 소개로 인천 주안동의 석바위 시장 2층 상가에 30평쯤 되는 하나로교회로 오게 됐다. 인천은 연고가 없는 낯선 곳으로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곳이다. 동창 전도사가 서울 청계천 로얄빌딩 12층에 하나로교회를 개척하면서 처가댁이 있는 인천 주안동에 지교회를 세우고 전도사 한 명을 보냈는데 석 달 만에 그만뒀다며 나에게 가달라고 한 것이다. 성도들은 20여명 정도였다.

인천에서 양지까지 통학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차가 너무 막히고 힘들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숙제로 받은 과제물은 너무 많았고 힘겨운 학창 시절이었다. 오후 예배 후 교회 주변에서 전도지를 돌리며 전도하자고 했더니 전도사님의 처형 집사 부부가 서울 전도사님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여기서는 계속 사역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면 교회를 개척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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