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의 미래를 묻다] ‘올해의 혁신’으로 등장한 비만치료제의 시대

2024. 5. 13. 00:3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인간의 몸에서 가장 많은 성분을 꼽으라면 단연코 물(H2O)로, 체중의 50~70%를 이룬다(유아 70%, 성인 남성 60%, 성인 여성 50%). 그다음이 단백질, 혹은 지방이다. 이처럼 지방은 인체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는 묵직한 존재이지만, 오랫동안 그들의 중요성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지방을 인체 구성 성분의 하나로 분명히 인식한 이는 체코의 인류학자 인드리히 마티엣카였다. 그는 1930년대 인간의 몸을 피하지방과 피부·골격근·뼈, 기타 나머지 물질들로 구분했다. 특히나 피하지방의 양은 인간의 신체 효율성을 측정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당시는 굶주림과 영양실조가 만연하던 시기였기에, 충분한 체지방은 건강의 상징이었다. 이처럼 초기의 체지방에 대한 연구는 지방을 줄이는 것보다는, 주로 굶주림이 인체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 식욕 억제하는 약으로 체중 조절
먹을 때만 효과 나타나는 단점도
작년 한 해 미국인 1.7%가 복용해
‘비만치료’ 새로운 사회풍조 유행

인간, 빠르게 뚱뚱해지다

[중앙포토]

상황은 빠르게 변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량 사정이 나아지자, 선진국에서는 굶주림보다는 지나친 체중 증가가 더 큰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이미 1970년대 미국 국립보건통계센터는 비만율이 높아지는 것을 경계하며, 이로 인한 보건의료 부담을 우려했다. 비만은 제2형 당뇨병 등 각종 대사질환의 발생 가능성을 현저히 높이며, 하지정맥류·수면무호흡증·골관절염 등을 유발한다. 우울증이나 자존감 저하 등 심리적 이상 증상과도 연관이 있다. 하지만 비만이 이렇게 많은 건강상의 문제를 야기함에도 불구하고, 비만은 질병보다는 도덕적 해이의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한마디로 너무 많이 먹고 너무 게으름을 부려서 생긴다는 것이다. 비만을 ‘개인적 관리 부족’의 문제로 인식하는 시각은, 그 책임 역시도 개인에게 국한시켰다. 이러한 시선은 세계보건기구(WHO)가 1997년 ‘비만에 대한 WHO 자문 보고서’에서 비만을 질병으로 정의한 이후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비만 치료제, 게임 체인저의 등장

이 상황을 바꾼 게임 체인저는 GLP-1 수용체에 결합하는 약물들인 세마글루티드나 리라글루티드였다.(대중적으로는 성분명보다는 오젬픽·위고비·삭센다라는 제품명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원래 GLP-1은 췌장에 존재하며, 인크레틴의 신호에 따라 인슐린과 글루카곤의 분비량을 조절하는 수용체다. 음식을 먹으면 소화과정을 거쳐 장에서 흡수되고, 일시적으로 혈당이 높아진다. 우리 몸은 늘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해 장은 인크레틴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해 췌장에 상황을 알린다. 장에서 분비된 인크레틴은 췌장의 GLP-1 수용체와 결합해 혈당이 높아졌음을 알리고, 이에 따라 췌장은 인슐린의 분비량을 늘리고, 글루카곤의 분비량은 줄여서 혈당 조절에 나선다. 인크레틴은 이제 혈액 속 포도당의 양이 늘어날 테니 이를 얼른 수거하고(인슐린), 기존에 포도당을 공급하던 밸브를 잠그라는(글루카곤) 신호를 췌장에 전달하는 메신저인 셈이다. GLP-1 연관 물질은 이 인크레틴의 기능과 비슷하게 행동하는 물질들로, 이미 1980년대부터 당뇨병 치료제로 개발 중인 물질이었다. 처음에는 췌장에만 영향을 미치는 줄 알았던 GLP-1 결합물질들이 뇌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알려진 건 1990년대였다. GLP-1을 주사한 쥐들은 그렇지 않은 쥐들에 비해 식욕이 감소해, 음식을 충분히 공급해도 훨씬 적은 양을 먹었다. 고무적이게도 이 결과는 사람에게도 이어졌다. 임상 시험에서 GLP-1 을 투여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푸드 노이즈(food noise)’, 즉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 흔히 ‘입이 심심하다’는 느낌이 줄어들어 식욕 조절이 쉬워졌다고 답했다. 이로 인해, 임상시험이 끝난 후 이들은 평균적으로 15% 이상의 체중 감량에 성공했다.

이 놀라운 체중 감량 효과는 제약회사들이 앞다투어 GLP-1 비만치료제를 선보이는 계기가 되었고, 2023년 한 해 동안에만 해도 전체 미국인의 1.7%가 이를 처방받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새로운 비만치료제의 파급력은 공신력 있는 과학저널 사이언스가 연말마다 발표하는 ‘올해의 혁신(BREAKTHROUGH OF THE YEAR)’ 코너에서 2023년의 가장 눈에 띄는 성과로 꼽을 정도로 엄청났다. 저마다의 논리에 따라 비만에 대해 ‘정당한’ 대응법을 논하던 수많은 관점이 확실한 효과를 보이는 약물의 등장에 판정패를 당한 셈이다.

새로운 사회적 계급이 등장할까

GLP-1 관련 비만치료제는 장점과 단점도 명확하다. 장점은 확실한 체중 감량을 보장한다는 것이며, 단점은 투여할 때만 효과를 보이며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GLP-1 비만치료제의 의미는 비만을 단순한 의지력의 실패가 아닌 생물학에 뿌리를 둔 만성 질환으로 받아들이는 관점을 확실히 했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변화도 심상치 않다. 이미 미국에서는 GLP-1 관련 비만치료제를 둘러싼 신조어와 새로운 사회 풍조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는 곧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장될 것이다. 다음 세대는 스스로의 몸이 점유하는 체적과 구성하는 체성분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가.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