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 함께한 그녀…끝은 외로운 파멸 [유경희의 ‘연금술의 미술관’]

2024. 5. 11.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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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우는 여인’ 도라
남프랑스 앙티브에서, 피카소와 도라.
피카소의 여자는 크게 둘로 나뉜다. 자살한 여자와 살아남은 여자.

피카소는 공식적으로 7명의 여자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중 2명과 결혼, 5명과는 동거를 했다. “좋은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는 피카소의 아포리즘은 단지 그의 작품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진정 그는 연인을 완벽하게 훔쳤다. 게다가 “나는 여자를 찾지 않습니다. 그저 발견할 뿐이죠!”라는 말처럼 발견은 그에게 영감이었고, 발견된 존재는 열렬히 사랑받았으며, 철저히 유린당했다.

더욱 치명적인 사실은 피카소 곁에 있었던 여성은 거의 대부분 파괴됐다는 사실이다. 정확하게 피카소로 인해 두 여자가 자살했다. 1927년 49세의 피카소와 만난 18세의 마리 테레즈는 10년간 동거하다 버림받았고, 피카소가 죽고 4년 후 저승에서 그에게 밥을 해줘야 한다며 목을 매 죽었다. 그리고 마지막 여자이자 법적으로는 두 번째 부인인 자클린 로크는 피카소가 죽은 뒤 13년 후인 1986년 피카소의 생일날, 그의 무덤 앞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두 여성과는 달리 끝까지 살아남은 두 여성이 있었으니, 도라 마르(1907~1997년)와 프랑수아즈 질로(1921~2023년)다. 두 여성은 비교적 자기 삶을 진지하게 성취했다.

도라는 90세까지 살았고, 질로는 102세까지 장수했다. 도라는 질로라는 새 연인이 생긴 피카소로부터 버림받고 신경 쇠약에 걸려 은둔 생활을 했지만 작업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피카소를 먼저 유혹할 만큼 기가 센 질로는 자발적으로 피카소를 떠난 유일한 여자다. 법학을 공부했던 여성답게 자녀 둘을 위한 충분한 상속을 받아냈다. 그뿐 아니라 피카소와 함께한 삶에 관한 책을 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고, 재혼도 했으며, 화가로서의 삶을 끝까지 살았다.

피카소가 더 열정적으로 사랑한 여자는 있을지 모르지만 도라만큼 피카소의 예술 세계에 영향을 끼친 여자는 없을 것이다. 사실 도라가 피카소를 만나기 전 유명 작가였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저 피카소의 연인으로 ‘우는 여인’의 모델이라는 사실뿐, 실제 그녀가 어떤 예술가였는지에 대한 조명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

도라는 크로아티아 출신 건축가였던 아버지와 프랑스 투르 출신 어머니 사이 외동딸로 파리에서 출생해 아르헨티나에서 유년을 보낸 뒤 프랑스로 돌아왔다. 당시 그녀는 패션과 광고 사진을 찍으면서 초현실적인 사진 작품으로 예술가 사이에서 화제를 모았다. 그녀의 작품은 만 레이와 브라사이의 작품과 견줘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놀랍다. 어쩌면 당시 슬럼프에 빠져 있던 피카소가 호기심을 가졌을 만한 진보적인 예술가였다. 게다가 금세기 인문 필독서인 ‘에로티즘’의 저자이자 ‘금기의 철학자’로 유명한 조르주 바타유의 애인이기도 했으니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을 터.

윤곽선이 뚜렷한 아름다운 얼굴에 우울하고 예민하고 격정적인 성격, 그리고 예술에 조예가 깊은 지성까지 갖춘 도라. 지금까지 피카소가 만난 유형의 여자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도라와 피카소는 만난 적이 있었지만, 도라는 이미 너무나 유명인이었던 피카소를 매료시킬 퍼포먼스를 기획한다. 바로 ‘손가락 게임’. 도라는 피카소가 자주 드나들던 카페 ‘레 되 마고’에서 검은 장갑을 끼고 칼로 손가락 사이를 오가는 게임을 벌인다.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도발적인 그녀를 본 스페인 남자 피카소는 단박에 투우를 떠올렸고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게다가 도라는 유창한 스페인어 능통자가 아니던가! 프랑스어가 아닌 모국어로 소통한다는 것은 교감의 깊이가 달랐을 것. 집으로 돌아가는 피카소의 주머니에는 피 묻은 장갑이 들어 있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꺼내 장식장에 넣었다. 전리품이다!

이런 사도마조히즘적인 도라에게 매료된 피카소는 그녀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았다. 급기야 두 사람은 2차 세계대전 중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게르니카’ 시대를 함께 연다. 삶 충동과 죽음 충동이 공존하는 전쟁 중의 사랑! 죽음에 대한 실존적 체험은 피카소의 그림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도라는 ‘게르니카’ 작업 전 과정을 사진에 담았으며, 덕분에 거의 모든 데생들은 보존됐다. 캔버스 위 작업은 최초의 도식적인 묘사부터 최종적인 결과물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촬영했고, 작업이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을 마치 잉태하듯 기록했다.

피카소, 암체어에 앉은 도라 마르, 1939년. 도라는 우는 여인으로 알려졌지만 실상 매우 반짝거리는 지성을 가진 도발적인 여자였다. 화가가 되라는 피카소의 제안에 따라 도라가 피카소풍으로 그린 화분과 배, 1937년경.
버림받고 ‘정신분열’ 앓은 도라

피카소는 ‘게르니카’ 속에서도 도라를 격렬하게 통곡하는 여자로 그렸고, 이후 단독 초상에서도 울거나 신경질적이거나 도발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피카소는 도라의 초상을 통해 전쟁을 겪는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림에 당시 도라의 심경이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 예컨대 피카소가 도라와 사귀는 전기에는 마리 테레즈와 삼자대면하는 일이 잦았고, 자기를 두고 벌이는 감정싸움을 즐겼다. 도라와 사귀는 말기에는 질로와 삼자대면을 시켰다. 새 연인이 생겼으니 떠나달라는 요구였다. 피카소는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옛 연인이 이제 물러났다는 사실을 새 연인 앞에서 확인시키기 위해 그런 짓까지 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질로에게 빠진 피카소에게 버림받은 도라는 정신분열을 앓는다. 옷은 찢어지고, 머리도 엉클어진 채 발견되는가 하면, 어떤 남자가 자신을 덮쳤다고 말하거나, 종교적인 환상을 보기도 했다. 급기야 피카소의 주치의기도 했던 유명한 정신분석의 자크 라캉에게 치료를 받게 된다. 그것도 7년 동안. 초반에는 피카소가 치료비를 댔다고 한다. 도라는 라캉에게서 불법적으로 전기충격 치료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지만, 그의 저작 어디에도 그녀의 정신 치료에 대한 언급이 없다. 아마 도라의 병명은 히스테리성 혹은 경계선 인격장애와 같은 질병이 아니었을까. 결국 도라는 가톨릭에 귀의했는데, 그것은 변치 않을, 더 이상 상처 주지 않을 단 한 명의 유일한 존재인 하나님을 최후의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녀에게 피카소는 하나님과 동급이었을지도.

도라는 피카소가 남겨준 남프랑스 메네르브의 빌라에 안착하면서 그림을 그린다. 황폐해진 삶 속에서도 사적이며 감정선이 담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방대한 양의 작업을 남겼다. 사진은 예술이 아니라며 그림을 그리라고 종용했던 피카소의 조언을 전적으로 수용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도라가 죽었을 때 그녀의 손에는 피카소가 제작한 그녀의 초상이 새겨진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피카소는 그녀에게 단순히 연인이 아닌,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죽기 전까지 몇 해를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가난하게 지내면서도 피카소가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를 한 점도 팔지 않았다고 한다. 오 마이 도라!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8호 (2024.05.08~2024.05.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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