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로벌] 아이티는 어쩌다 갱들의 천국이 됐을까 (영상)

태원준,전병준 2024. 5. 11.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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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 방탄조끼를 입은 이 남성은 ‘바비큐’로 불리는, 아이티에서 가장 큰 G9이라는 갱단의 두목인데, 지금 기자회견을 하는 중입니다. 갱단 두목이 기자회견이라니 그것도 신기한데, 내용은 더 황당하죠. 그는 아리엘 앙리 총리를 향해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대학살극이 벌어질 거라면서 총리의 퇴진을 요구합니다. 범죄 집단이 공개적으로 정권 교체를 주장하고 나선 겁니다. 그리고 얼마 뒤 진짜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요, 총리가 바비큐의 요구대로 사임을 합니다.

바비큐의 본명은 지미 셰리지에인데, 사람들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이곤 해서 바비큐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바비큐는 기자회견을 좋아하고 자주 합니다. 외신 인터뷰도 수시로 하는데 카메라를 끌고 다니며 자신이 노인과 아이들과 가난한 청년들을 얼마나 자애롭게 돌보고 있는지 과시하곤 합니다.

그는 자신을 체 게바라나 피델 카스트로에 빗대는 것도 좋아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범죄가 아니라 혁명이란 뜻입니다. 그의 근거지인 슬럼가 ‘델마스’에는 체 게바라 벽화가 곳곳에 그려져 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힙합 스타일로 치장한 이 친구는 포르토프랭스 항만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또 다른 갱단의 두목입니다. ‘이조(Izo)’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스물여섯 살 이 젊은 두목은 랩에 꽂혀 있습니다. 싱글앨범까지 내고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왔는데, 유튜브 팔로어가 10만명이 넘습니다.

뮤직비디오 타이틀에 ‘ATIS MAFIA’란 글귀가 보이죠? ‘아티스트 마피아’란 뜻입니다. 음악 하는 갱단을 표방하며 랩에 메시지를 담아 추종자를 끌어 모으는 겁니다. 아이티에는 총을 만드는 공장이 없습니다. 갱단이 보유한 무기는 전부 밀수한 것입니다. 그 해상 밀매 루트를 이조가 틀어쥐어서 어린 나이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됐습니다.

뉴스로 전해지는 아이티는 언제나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의 아이티는 나라라고 부를 수도 없는 지경입니다. 수도인 포르토프랭스는 아예 95%가 갱단에 장악돼있는데, 갱단마다 영토가 있어서 경계에선 매일같이 총격전이 벌어집니다. 수도에만 이런 갱단이 100개, 전국적으로는 200개가 넘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갱 두목 바비큐. 총리도 물러나게 하는 아이티 최고의 갱 두목인 바비큐도 자기 영토 밖은 위험해서 나가지도 못합니다. 두 세력이 다투는 통상적인 내전하고는 완전히 다른, 완벽한 카오스, 무정부 상태인 겁니다.

2023년 아이티에서는 갱 폭력에 4800명이 살해되고 2500명이 납치됐는데, 2024년 들어 불과 석 달 새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갱단을 피해 수도를 탈출한 주민은 3만명이 넘습니다. 한때 ‘카리브해의 진주’라 불렸던 포르토프랭스는 이제 아무 때나 울리는 총성과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한 곳이 됐습니다.

한 여성이 흰 천을 가져다 누군가에게 덮어주고 있는데요, 갱단에 살해된 사람입니다. 거리 한복판에 저렇게 시신이 널브러져 있어도 아무도 치우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 시신은 대부분 맨발입니다. 생필품을 구하기 힘들어 누군가 신발을 벗겨가니까요. 맨발로 방치된 시신을 개들이 뜯어먹습니다.

모두가 모두를 향해 총질을 해대는, 이런 대혼돈의 상황은 지난 2월 29일, 갑작스럽게 전환점을 맞습니다. 갱들이 일제히 손을 잡고 정부를 상대로 연합작전에 나선 겁니다. 이들은 일단 경찰서 수십 곳을 습격해 불태웠고, 공항과 항구를 점거해 해외 출장 중이던 앙리 총리의 귀국을 봉쇄했습니다. 총리의 비행기는 착륙 허가를 받지 못해 이웃나라 푸에르토리코로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감옥 두 곳을 공격해 죄수 4000명을 풀어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풀려난 죄수 대부분이 갱단 조직원으로 흡수됐습니다. 전력 증강을 위한 리크루트 계획까지 세워놓고 작전을 벌였던 겁니다.

당시 앙리 총리의 출장지는 아프리카 케냐였습니다. 케냐는 유엔이 아이티의 혼란을 수습하려 다국적 평화유지경찰 파견을 제안했을 때 유일하게 손을 든 나라입니다. 케냐 무장경찰이 갱단에 맞서 질서를 유지하는 동안 대선을 치른다는 구상 아래, 앙리 총리가 파견 절차를 마무리하러 간 거였습니다. 케냐 병력이 들어오면 갱들의 입지는 급격히 좁아지겠죠. 그걸 막으려고 총리가 나라를 비운 사이 갱들이 선제공격에 나선 겁니다.

갱단 연합체가 띄운 드론 이미지.

바비큐를 포함한 갱단들은 ‘리빙 투게더’ 즉 ‘함께 살자’란 이름의 갱단 연합체를 꾸렸습니다. 이건 갱단이 띄운 드론 이미지인데, 갱들은 이런 정보를 토대로 거리에서 정부군을 찾아내 정밀 타격하고, 교도소를 지키는 병력을 습격했습니다.

카리브해 연안국 협의체 카리콤의 아이티 관련 기자회견.

앙리 총리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지난 3월 6일 “과도정부가 꾸려지는 대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카리브해 연안국들이 아이티 각계 대표자로 ‘과도위원회’를 꾸려 대선을 치르는 로드맵을 제시했습니다. 그동안 앙리 총리가 거부해 진전되지 못했던 방안인데, 갱들의 난동에 총리가 물러서면서 유력한 대안이 됐습니다. 이 과도위원회에 갱들이 들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서로 총질하던 갱들이 손잡고 아비규환을 만든 목적이 바로 이거였던 겁니다.

2022년 포르토프랭스 석유 저장고 점거 당시 바비큐.

바비큐는 2년 전 포르토프랭스 석유 저장고를 점거했을 때부터 이걸 노려왔습니다. 그때 앙리 정부에 세 가지를 요구했는데요, 첫째, 총리 사임과 과도정부 구성. 둘째, 갱단 조직원의 모든 범죄 혐의 사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장한 게 과도정부에 갱단 대표 참여였습니다. 바비큐 자신도 숱한 범죄로 영장이 발부된 상태입니다. 주민 생명줄인 연료를 틀어쥔 채 자신의 범죄 전력을 세탁하고 권력을 잡아보려는 거였습니다. 그땐 말로 그쳤지만, 이번엔 좀 다릅니다. 이대로라면 갱들이 국가 권력을 잡는 게 완전히 황당한 얘기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이티 갱들은 어쩌다 정권을 넘볼 만큼 커져 버린 걸까요? 이건 부패한 정치의 작품이었습니다. 아이티의 갱단의 9할은, 정치인들이 키워준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비큐는 원래 포르토프랭스 경찰이었습니다. 경찰특공대에서 갱단과 싸우다가 2018년 ‘델마스 식스’라는 자기 갱단을 만들어 경찰 신분을 유지한 채 두목이 됐는데, 이게 가능했던 건 당시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과 여당이 경찰이자 갱 두목인 바비큐를 ‘정치깡패’로 활용한 덕분이었습니다. 돈과 무기를 지원해주면서 야당 인사를 테러하거나 반정부 시위대를 공격하는 ‘궂은일’을 맡긴 겁니다. 바비큐의 갱단은 민간인 학살을 여러 차례 자행했는데, 전부 야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에서 벌인 일이었습니다.

이후 전업 갱이 된 바비큐는 2020년 정치 커넥션을 매개로 다른 갱단들을 포섭해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모두 9개 갱단이 참여해서 ‘G9’이라 명명한 거대 조직의 리더가 됐습니다. 이들이 정권과 밀착해 총질을 해대자 야당 정치인들도 질세라 자기 편 갱단을 확보하고 나섰습니다. ‘티 가브리엘’의 ‘G펩(G-Pep)’은 야당과 결탁한 갱단 동맹입니다. 래퍼 보스 이조도 G펩의 일원입니다. G9과 G펩은 이른바 ‘나와바리’를 놓고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였습니다. 여당과 야당의 대리전인 셈인데, 그 틈바구니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됐습니다.

깡패쯤이야 군대를 동원해 쓸어버리면 되지 않나? 그런데, 아이티엔 군대라고 부를 만한 제대로 된 조직이 사실상 없습니다. 아이티가 갱단에 점령당한 진짜 이유이자, 현재 아이티가 겪고 있는 혼란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티는 쿠데타가 워낙 잦아서 과거 통치자들이 군대를 유명무실하게 축소하거나 아예 해산시키곤 했기 때문입니다.

군대가 다시 생긴 건 해산된 지 20년 만인 지난 2019년이었습니다. 국가를 지탱하는 군사력의 공백, 누군가는 메워야 했겠죠. 처음엔 독재자의 사설 용병집단이 그 역할을 했는데, 이게 지금 아이티 거리를 휩쓸고 있는 200여개 갱단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통통 마쿠트’라는 무장조직이 있습니다. 그걸 만든 건 여기 이 사람, ‘파파독’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아이티의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 대통령입니다. 1960년대 아이티는 반복되는 쿠데타로 혼란했고, 이런 와중에 당선된 뒤발리에 대통령은 군부 쿠데타를 막기 위해 아예 육군사관학교를 없애버렸습니다. 대신 ‘통통 마쿠트’란 무장조직을 만들어 치안을 맡겼죠. 통통은 아저씨, 마쿠트는 민병대란 뜻인데, 군인도 경찰도 아닌, 뒤발리에 개인을 위한 용병이었습니다. 한때 1만명에 달했던 통통은 슬럼가에서 총질, 칼질 좀 해봤다는 거친 이들로 채워졌습니다.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을 받던 이들에게 무수한 사람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뒤발리에 부자의 세습정권이 막을 내린 1986년 해체됐지만, 그 많던 통통이 어디로 갔겠습니까? 이 동네 저 동네 터를 잡고 군벌 행세를 했습니다. 오늘날 갱단의 원조가 된 겁니다.

최근엔 ‘키메라(chimères)’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1991년엔 아이티 최초의 민주적 선거로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선출됐는데, 1년도 안 돼 또 쿠데타가 터졌고, 쫓겨났다 복귀한 아리스티드는 못 믿을 군대를 아예 해산해버렸습니다. 하루아침에 군복을 벗은 군인이 7500명이었다는데, 이들은 또 어디로 갔겠습니까? 반군이 되거나 거리의 갱단이 됐습니다. 대신 아리스티드는 정권을 옹위할 자신의 갱단 키메라를 만들었고, 2004년 아리스티드가 축출되자 이들도 거리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절반쯤은 사병이고, 절반쯤은 갱단인, 아이티 갱들은 우리나라 조폭과는 전혀 다른 범죄 집단입니다. 그들은 공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뒷배가 공권력인 걸 넘어서, 자신들이 한때 공권력 자체였으니까요. 이 와중에 2021년엔 모이즈 대통령이 암살되는 최악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선출된 공직자가 한명도 없는 상태가 된 거죠. 국가권력의 완벽한 공백. 이걸 아이티의 갱들은 절대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참에 나라를 먹겠다고 달려든 겁니다.

갱들의 정치적 야욕에 불을 지른 인물이 있습니다. 가이 필립이란 정치인입니다. 마약 밀수 및 돈세탁 혐의로 미국 감옥에서 7년을 복역했으니, 정치인이기 전에 범죄자인데, 그가 2023년 11월 출소해 아이티로 돌아오더니 자기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닙니다.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아공 만델라도 감옥에 갔었고, 베네수엘라 차베스도 감옥에 갔었고, 브라질 룰라도 감옥에 갔다 와서 대통령이 됐다. 나라고 안 될 게 뭐냐.” 그를 지켜본 갱단 두목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저런 놈도 대통령 하겠다는데 나라고 안 될 게 뭐냐.”

정치가 후지면 범죄자들이 이렇게 뻔뻔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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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전병준 기자 jb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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