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은 그저 통로라 생각했는데…유럽인이 본 충격 광경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11>]

김기협 2024. 5. 1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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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역사학자

태평양 섬들의 주민 정착 과정을 설명하는 책을 소개한다. 니콜라스 토머스의 〈항해자들: 태평양에 자리 잡은 사람들 Voyagers: The Settlement of the Pacific〉(2021).

Nicholas Thomas, Voyagers: The Settlement of the Pacific.

제국시대 일본에서는 동남아와 함께 태평양 일부 지역도 ‘남양’이라고 불렀다. 1차대전 후 독일로부터 신탁통치권을 넘겨받은 미크로네시아 일대였고, 이것이 ‘태평양전쟁’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지금 쓰고 있는 〈남양사〉의 ‘남양’에는 태평양의 섬들이 들어가지 않지만, 동남아와 연결되어 있었다. 남양어가 태평양의 대부분 섬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남양어의 태평양 전파는 동남아보다 훨씬 뒤에 일어난 일인데, 그 양상을 살핌으로써 동남아에서 벌어진 현상을 미루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많다. 태평양 지역에 관한 연구는 동남아에 비해 민족주의의 영향을 적게 받았기 때문에 실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에 유리한 측면이 크다.


항해의 통로로만 여겨지던 태평양


태평양의 섬들은 미크로네시아,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의 세 영역으로 구분된다. 애초에는 태평양의 모든 섬을 폴리네시아로 불렀는데, 서쪽 일대를 멜라네시아(남쪽)와 미크로네시아(북쪽)로 구분하는 관행이 1830년대부터 자리 잡았다.
남양어의 전파 시기(추정).

언어와 문화에서는 세 영역 사이에 확연한 차이가 없다. 다만 주민의 피부색 때문에 ‘검다’는 뜻의 이름을 얻은 멜라네시아에는 종족 면에서 다른 두 영역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밖의 차이는 각 영역의 위치 때문에 문명 전파의 방향과 시기가 다른 정도다.

1521년에 마젤란 함대가 가로지른 뒤에도 유럽인은 태평양을 ‘사람’ 사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메리카와 동인도제도 사이의 통로로 여겼을 뿐이다. 2세기 반이 지나 제임스 쿡 선장의 세 차례 탐사(1768-71, 1772-75, 1776-79)를 통해 태평양 주민들의 모습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쿡 함대의 항로. 1차는 적색, 2차는 녹색, 3차는 청색(쿡이 죽은 후는 점선)으로 표시되었다.
1773년경 타히티에서 인신 공양 제례를 참관하는 쿡 일행(1815년 그림).

“태평양의 개척자”로서 쿡의 역할이 유럽중심주의 때문에 과장되어 왔다는 비판도 있으나 토머스는 지나친 과장이 아니었다고 본다. 쿡의 탐사는 태평양에 대한 외부의 인식을 확장-심화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1770년대는 계몽주의가 크게 피어난 시기였다. 과학적 관측을 목적으로 이뤄진 10년간의 탐사에는 당대의 1류 과학자들이 참여해서 태평양만이 아니라 지구와 우주에 대한 이해를 늘리는 데 공헌했다. 그리고 일반 항해와 달리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방문을 통해 현지민 사회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태평양 ‘사회’의 존재를 발견한 쿡 항해


쿡 탐사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태평양 문화(또는 문명)’의 존재였다. 유럽보다 열 배도 더 넓은 영역의 주민들이 상당 범위의 언어와 문화와 기술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주민들이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곳에 대해 알고 있고, 더러 다니기도 한다는 사실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이 사실을 제일 확실히 알려준 사람이 투파이아(Tupaia)였다. 첫 기착지 타히티에서 채용한 투파이아를 쿡 일행은 종교인이며 항해가라고 인식했다. 샤먼-학자-기술자 등 여러 면모를 겸비하던 현지 지도층의 모습에서 일부가 파악된 것으로 보인다. 투파이아는 유럽까지 따라가는 데 동의했으나 도중에 죽었다.

타히티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뉴질랜드에 갔을 때 투파이아가 마오리족과 말이 통하는 것을 보고 유럽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행했던 박물학자 조지프 뱅크스가 타히티어, 말레이어, 자바어, 마다가스카르어의 단어 목록을 만들어 그 유사성을 확인했다고 하니, 남양어족에 대한 비교언어학 연구의 시작인 셈이다. (마다가스카르 출신 노예가 있어서 마다가스카르어까지 포함되었다고 한다.)

제임스 쿡(1728-1779) 초상.
조지프 뱅크스(1743-1820, 후에 왕립학회 회장을 41년간 지냄) 초상. 제1차 쿡 항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769년 투파이아의 도움으로 그린 해도.

투파이아의 더 놀라운 공헌은 해도 작성을 도와준 것이다. 폴리네시아의 상당히 넓은 영역에서 자기가 가본 섬과 아는 섬 백여 개의 위치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아는” 섬이라는 것이 얼마나 깊이 아는 것이었을까? 어렴풋이 들어본 정도는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으리라고 토머스는 판정한다. 당장 배를 몰고 나가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가는 길과 방법을 확실히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 넓은 바다 구석구석의 주민들이 서로 통하는 말을 쓰고, 대단히 먼 섬의 존재까지도 서로 알고 지낸다는 것이 유럽인에게는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항로 주변 자연환경의 일부로 여기던 원주민을 ‘사회적 동물’로 관찰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오스트로네시아 팽창의 축소판 라피타 팽창


토머스의 책에서 큰 비중을 가진 주제 하나가 ‘라피타문화(Lapita Culture)’다. 1950년대에 뉴칼레도니아 그랑드테르섬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특이한 기하학적 무늬가 찍힌 토기 조각이 다수 출토되었다. 처음에는 좁은 지역의 특이 현상으로 간주되었는데, 다른 곳에서도 계속 발견되어 1970년대까지는 멜라네이사에서 폴리네시아에 결친 ‘라피타문화권’이 설정되었다. 이 유형 토기는 기원전 16세기에서 기원전 6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라피타 문화의 확산 과정을 토머스는 ‘라피타 팽창(Lapitan Expansion)’이라고 한다. ‘오스트로네시아 팽창’의 한 단계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라피타문화 유적지가 2백여 곳 발굴되었는데, 초기 유적은(기원전 16-13세기) 비스마르크제도(뉴기니 동북쪽)에 많이 있고 기원전 10세기 이후 동쪽으로 확산되어 피지를 지나 사모아, 통가 일대까지 퍼져나갔다.

타이완과 루손섬(필리핀)에서 라피타 토기의 선행 형태가 확인되어 라피타문화가 멜라네시아에 전파된 경로는 확인되었다. 그런데 멜라네시아로부터 동쪽 폴리네시아로 전파된 경로에는 근년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2008년의 유전자 조사에서 멜라네시아 주민과 다른 해역 주민 사이에 전반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확인된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로운 가설이 제기되었다. 미크로네시아 방면에서 전파된 라피타문화가 한편으로 멜라네시아에 정착하면서 빠른 속도로 그 지역을 지나 폴리네시아에 나란히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멜라네시아에는 선주민이 있었으나 폴리네시아에는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라피타 팽창에 관해서는 아직도 많은 의문이 남아있다. 그래도 오스트로네시아 팽창의 과정 중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많은 단계로서 중요한 열쇠들을 제공한다고 토머스는 본다. 토머스가 가장 흥미롭게 여기는 것은 팽창의 동력이다. ‘인구 압력’ 같은 통설로 설명되지 않는 상황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섬의 ‘개척’ 자체를 열망하는 가치관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한다.

라피타 토기의 전형적 무니.
라피타문화 분포지역.

바운티호 선상반란과 핏케언섬의 재발견


토머스의 책을 내려놓고 쿡 선장 시대의 태평양 탐사 상황을 보여주는 일화 하나를 붙인다. 폴리네시아의 동쪽 끝 라파누이(이스터섬) 다음으로 외진 곳의 피트케언섬을 찾았다가 도로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이야기다. 이 섬을 1606년 스페인 배가 발견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고, 1767년에 영국 배가 발견해서 위치를 기록했다. 그런데 그 기록에 경도 3도(약 350킬로미터)의 오차가 있어서 수십 년간 다시 발견되지 못하고 있었다.

1790년에 피트케언섬을 다시 찾은 사람들에게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그 전해에 통가 부근에서 바운티호 반란을 일으키고 타히티섬으로 도망한 사람들이었다. 구명보트로 쫓겨난 선장 일행이 간신히 영국에 돌아간 후 반란자들에게 체포 위험이 닥치자 바운티호를 몰고 잊혀진 섬을 찾아 나선 것이다. 있기는 있는데 수십 년간 다시 찾지 못하고 있는 섬이니 자기네가 찾을 수 있다면 안전한 곳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바운티호에서 선장 일행을 쫓아내는 모습. 블라이 선장은 쿡 선장의 3차 항해에 참가했던 사람이고 사건 직후에는 여론의 동정을 받았으나 진상이 밝혀짐에 따라 “반란을 당해 싸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피트케언섬 주민들(1916년 촬영). 1790년에 입주한 영국인 선원과 끌려간 타히티인의 후손들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47명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1814년 발견 당시의 46명에서 한 명 늘어난 것인가?)

외부로부터의 안전은 확실한 곳이었다. 선상반란 후 바운티호에 남아있던 25인 중 아홉 사람이 피트케언섬에 들어갔는데(20인의 타히티인을 데리고), 1808년 미국 어선이 우연히 들렀을 때는 선원 중 한 사람만 살아남아 있었다. 다른 선원들은 대부분 서로 싸우다가 죽었다. 1799년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네드 영과 존 애덤스가 남아있던 타히티인을 이끌고 평화로운 생활방식을 이루었다. (술 만드는 장비를 없앴다.) 영은 이듬해 죽고 애덤스가 성경책을 중심으로 40여 인의 ‘부족’을 이끌어가는 모습이 발견된 것이다.

1808년 당시에는 영국이 나폴레옹전쟁 때문에 경황이 없었다. 1814년에야 두 척의 해군 함정이 우연히 기착해서 상황을 보고했다. 그곳 주민들이 애덤스를 중심으로 성경을 읽으며 지낸다는 보고를 받은 해군성은 불문에 붙이기로 결정했다. 선상반란 후 25년, 타히티에서 체포된 선원 세 명의 교수형 집행 후 2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1814년 발견될 당시 서즈디 옥토버 크리스천(1790-1831)의 모습. 선상반란 지도자 플레처 크리스천과 타히티인 어머니 마우아투아의 아들이다. 이런 청년과 아이들이 성경책 한 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발견된 것이다.
존 애덤스와 그의 집이 그려진 피트케언 우표. 19세기 유럽인에게 선상반란은 끔찍한 범죄였지만, 기독교문명 전파는 그 범죄를 덮을 만한 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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