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굽는 타자기]젖니를 뽑다

박소연 2024. 5. 10.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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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상처를 은유하는 젖니
자신과 화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감각적이고 시적인 언어로 묘사

성장과 성숙이란 어쩌면 미처 뽑아내지 못한 젖니와 같은 과거의 상처들을 마주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타인으로부터 완전하게 채울 수 없는 허기를 인정하고 스스로 나를 돌보고 영구치 같은 삶의 뿌리를 만들어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새 책 '젖니를 뽑다'는 1992년생 영국 여성작가 제시카 앤드루스의 소설이다. 영국 북부 출신의 제시카 앤드루스는 MZ세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목소리로 주목받는 작가다. 데뷔작 '솔트워터'로 포티코상을 수상했다. 최신작인 '젖니를 뽑다'로는 2023년 영국 왕립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신작의 주인공은 런던, 바르셀로나, 파리를 오가며 위태롭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간다. 이름없는 주인공 여성 '나'는 결핍과 불안정, 노동자 계층 가족, 끝없이 표준을 강요하는 사회 안에서 자신의 몸이 더 날씬해져야 한다고 믿으며 자란다.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식욕과 욕구를 억제하고 자기 파괴적인 생활을 해 온 그녀는 이십 대 후반에 만난 '당신'에게 빠져든다. 그와의 행복한 연애는 그녀의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행복한 이 순간을 자신이 누려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의 존재는 그녀가 지금까지의 삶에 의문을 제기하고 과거를 직면하게 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녀를 관능과 감각으로 이끌지만, 그녀는 욕구가 충족되는 삶에 익숙하지 않기에 여전히 불안감을 느낀다.

제시카 앤드루스는 시적인 운율을 지난 특유의 현재형 문장, 감각적인 언어로 복잡하고 다면적인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특히 노동자 계층 여성의 삶과, 신체에 관한 사회적 요구와 수치심, 죄책감 등의 복합적인 감정에 주목한다.

소설 속에서 '당신'과의 연애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지금의 그녀를 만든 과거의 궤적들과 마주하게 한다. 거기에는 가족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 여성을 향한 사회적인 억압과 폭력, 극심한 다이어트로 몸을 혹사해 온 경험 등 상처의 파편들이 가득하다.

너무 오랫동안 텅 빈 채로 삶아와서 포만감을 느끼는 법도 잃어버린 소설 속의 주인공은 소셜미디어와 가상현실 속에서 사는 현세대의 모습 같기도 하다.

가난한 젊은 여성인 그녀는 카페와 술집, 갤러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보모로 일하면서 자신이 있을 곳을 끝없이 찾는다. "집이 그립지만, 내 집은 어머니가 있는 그곳에 없고, 당신이 있는 이곳에도 없다."(274페이지)라고 말하는 그녀가 온전히 존재할 물리적,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독자들은 불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지켜보게 된다.

이 소설을 읽다가 중간에 덮을 수 없는 이유는 "수박 겉핥기식이 아니라 깊이 있게 살면서 온전한 삶을 누리고 싶다"는 주인공을 속으로 응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내 안에 있는 여자를 움찔하지 않고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그녀를 먹이고 보살피는 법, 그녀를 나로 인정하는 법"을 시간과 경험을 통해 배워간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작가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시간순이 아니라 현재에 과거의 한 장면이 툭 끼어드는 듯한 독특한 형식으로 작품을 쓴 이유에 대해 "불협화음처럼 분열되고 파편화된 방식이야말로 몸에 대한 내 경험이기에, 몸에 관해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밝혔다.

이 소설에서 '나'는 이름이 없다. 자신의 모양대로 세상에 존재하고 싶은 이름 없는 주인공의 목소리. 소설 내내 '당신'이 쉽게 던지는 "뭘 원해?"라는 물음에 그녀는 대답을 피하거나 망설이며 모든 것이 사라지고 부서져 버릴까 두려워한다. 소설의 끝에서 마침내 '나'는 오랫동안 미뤄 온 그 대답을 들려준다. 젖니를 뽑고,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젖니를 뽑다|제시카 앤드루스 지음|김희용 옮김|인플루엔셜|363쪽|1만6800원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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