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앉아 대화할 줄 모르는 한국인… ‘숙론’을 권한다
최재천 지음
김영사, 222쪽, 1만8000원
“나는 대한민국 교육이 안고 있는 온갖 문제점은 물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갈등도 상당 부분 토론 부재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통합적 지식을 강조한 ‘통섭’이란 말을 유행시킨 최재천(69)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가 ‘숙론(熟論)’이라는 새로운 키워드를 들고 나왔다. 9년 동안 다듬어온 주제라고 한다.
숙론은 “여럿이 특정 문제에 대해 함께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하는 과정”을 뜻하는 말이다. 흔히 사용되는 토론이라는 말 대신 숙론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제안한 것은 한국에서 토론이 너무 오염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숙론’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토론하자고 모이면 다들 너무 결연하다. 상대를 어떻게든 제압하려고 한다. 서로 말꼬리 잡고 말싸움만 벌인다”며 “그건 논쟁이다. 토론은 자기 얘기만 하면서 논쟁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얘기에 귀 기울이며 합의를 도출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숙론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숙론을 “누가 옳은가를 결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으려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는데, 이 한 문장에 한국 토론 문화의 핵심적 문제가 요약돼 있다. 우리의 교육과 사회, 정치 현장에 토론이 없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토론은 찾아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토론을 생산적인 과정으로 여기지 않는다. 거추장스런 절차, 가능하면 피해야 하는 일로 취급한다. 최 교수는 이런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모습을 “마주 앉아 대화할 줄 모른다”고 표현했다. 토론 부재는 막대한 갈등 비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너무나 자주 관료들이 기획하고 대체로 호의적인 전문가 몇 명만 초청해 회의 몇 차례 한 다음 사업을 공표한다… 하지만 정부가 무슨 정책을 내놓든 그저 30분이면 초토화된다. 인터넷에는 비판이 넘쳐나고 정책의 영향을 입을 당사자들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선다… 처음부터 이해관계에 얽힌 모든 시민과 단체의 대표들이 마주 앉아야 한다. 비록 과정은 지난하고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시간과 노력의 낭비가 덜하다.”
최 교수는 ‘위원장 동지’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대학이나 정부, 사회단체에서 만든 여러 위원회에 불려 다녔고 종종 위원장 자리를 맡았다. 이명박 정부의 사회통합위원회, 박근혜 정부의 국민대통합위원회, 문재인 정부의 기획재정부 중장기전략위원회와 코로나19 일상회복지원위원회에 참여했다. 2012년엔 제돌이야생방류시민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 평생 대학교수로 일하면서 토론식 수업을 고수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나만큼 토론을 많이 시도하고, 많이 실패해본 사람도 없을 것”이라면서도 “갈등이 극심한 한국 사회에서 숙론이라는 과정이 아니라면 문제를 풀 가능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저출산 문제를 예로 들었다.
“대통령이나 정부 부처가 저출산 문제를 풀 수 있을까? 어떤 현인이 답을 내려줄 수 있을까? 굉장히 다양한 분야가 이 문제에 관련돼 있는데, 숙론을 거치지 않으면 문제를 풀 가능성조차 없다. 지금 당장 전문가들과 정부, 시민들이 모여서 숙론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최 교수는 “우리가 토론을 못 하는 건 토론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라면서 “교육과정에 숙론 수업이 꼭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숙론의 장이 열리면 우리 사회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얘기했다.
“지난 20∼30년간 우리 사회가 발전해온 모습을 보면 웬만한 분야에서는 거의 세계 최고 수준에 다다른 것 같다. 하지만 이 구슬들을 꿰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문제가 다 갈등으로 치닫는다. 우리가 토론하는 방법을 조금만 배우면 금방 사회가 달라질지 모른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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