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2번 끊었는데"…'마약사관학교' 오명 씻는 이 프로그램 [르포-파란명찰방 변신]

김정민 2024. 5. 1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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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살 외아들이 유치장 너머로 손 붙잡고 ‘아버지 이제 그만 하시라’며 울더군요…. 다 큰 아들의 눈물을 그날 처음 봤습니다. "
부산교도소 중독재활수용동에서 만난 마약 수형자 재즈(63·닉네임)씨는 필로폰 투약으로 6번째 체포됐던 지난해 봄을 잊지 못했다. 그는 수의에 달린 ‘파란 명찰(마약사범 표식)’을 쓸며 “반드시 약을 끊겠다는 아들과의 약속을 지킬 것”이란 다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지난달 17일 부산 강서구 부산교도소에서 마약류 회복이음 과정에 참여한 재즈씨가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죽음조차 허락 안 돼…40년 중독 세월 멈출 것”


재즈씨는 스물세 살이었던 1984년 제대 후 고향인 부산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처음 필로폰을 접했다. 2년의 중독 끝에 희망을 잃고 저지른 과다투약(자살 기도)으로 일주일 간 정신을 잃었다. 이로 인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발작이 거듭됐고 온갖 환각·환청 부작용에 시달렸다. 한 번의 과다투약으로 망가진 몸을 회복하는 데만 15년이 걸렸다.

이후 재즈씨는 20년간 마약과 담을 쌓는 데 성공했다. 부산→제주→서울로 계속 이사를 다니고, 마약과 연관된 인간관계를 전부 끊어낸 덕이었다. 그러나 40대에 사업이 잘 풀리지 않으면서 고향 친구와 함께 다시 마약의 늪에 빠졌다. 약에 손을 댈 때마다 치매를 앓는 노모가 아들을 살리겠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2013년부터 수감과 출소가 반복됐다. 그사이 처음 약을 권했던 친구를 포함해 주변에서 30명 이상이 마약으로 생을 달리했다.

재즈씨가 미술치료 당시 ‘가장 후회되는 순간(왼쪽)’과 ‘어린 시절의 나’를 주제로 그린 그림들. 송봉근 기자

재즈씨는 지난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여섯 번째 수감된 뒤 교도소 내 단약(斷藥) 프로그램인 ‘마약류 회복이음 과정(이하 회복이음)’에 자원했다. 그는 “마약은 끊는 게 아니라 평생 참는 건데 단약기 동안 내가 여전히 ‘중독자’인 걸 잊었던 게 재발 원인이었다”며 “과거에 지금 같은 전문적인 재활 교육을 받았다면 친구와 내 삶도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24시간 밀착치료 나선 부산교도소 가보니


‘파란 명찰방’이 달라지고 있다. 지난달 17일 찾은 부산교도소에서는 재즈씨를 포함한 투약사범 13명이 회복이음 과정의 치료·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중 20~30대 청년층이 절반, 흰머리가 희끗한 중·노년층이 절반 가량이었다.
지난달 17일 부산 강서구 부산교도소에서 마약류 회복이음 과정에 참여한 마약사범들이 강사로부터 교육을 받고 있다. 송봉근 기자

법무부가 지난해 9월 신설한 회복이음은 전국 투약사범 가운데 단약 의지가 높은 지원자를 선발해 3개월 간 집중교육하는 프로그램이다. 현재 부산교도소와 화성직업훈련교도소에서 두 차례씩 시행됐다.

참여자들은 ‘치료공동체’가 되어 별도의 수용동에서 24시간 밀착 재활을 받는다.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르며 내·외부 전문가들과 함께 매일 자조모임을 열고, 중독 회복을 위한 12단계 프로그램을 수행한다. 1:1 상담과 집단심리치료, 미술치료·치유농업 등의 특별활동도 이뤄진다.

김영희 디자이너


팬데믹이 부른 중독…“교도소서 단약지식 배워”


지난달 17일 부산 강서구 부산교도소에서 마약류 회복이음 과정에 참여한 워터씨가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참여자 가운데는 코로나19가 마약에 손대는 계기가 된 초범도 있다. 워터(38)씨는 운영하던 카페가 폐업에 내몰리며 필로폰에 처음 손을 댔다. 2년간 거의 매일 필로폰을 투약하면서도 “언제든 끊을 수 있다는 조절 망상”에 빠져 살았다. 그는 “초범은 집행유예일 줄 알았는데 2022년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일주일간 한 끼도 못 먹을 만큼 충격을 받아 단약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주변의 도움이나 전문 지식 없이 혼자 약을 끊으려 했다면 실패했을 것”이라며 “다시는 징역을 살고 싶지 않다. 출소 후에는 이곳 선생님들 조언에 따라 마약 관련 경험이나 지인이 없는 곳으로 이사도 가고 중독재활센터도 다닐 생각”이라고 말했다.

워터씨가 ‘어린 시절의 나’를 주제로 미술치료 당시 그린 작품. 주변인들로부터 있는 그대로 인정·수용받았던 유년 시절을 표현한 그림이다. 송봉근 기자


‘마약 사관학교’ 오명 씻기…파란명찰방→재활방 바꾼다


교도소는 그간 파란 명찰은 따로 모아 수용한다는 원칙 탓에 ‘마약 사관학교’라는 오명을 썼다. 다른 재소자들에게 마약이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지만, 이런 환경이 도리어 마약 정보와 네트워크를 쌓는 토양이 되어 재범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았다. 지난해 연간 마약사범 숫자가 전년 대비 50% 이상 늘어난 2만7611명으로 치솟고, 재범률 35%가 될 때까지 교정당국이 제역할을 못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김영희 디자이너

교정당국이 마약사범에 대한 적극적인 단약 교육과 재범 예방에 나선 배경이다. 부산교도소 마약재활 전담직원 이승욱 의료상담심리학 박사는 “마약은 가장 큰 피해자가 자기 자신”이라며 “범죄자로선 처벌하되 환자로선 강력한 치료적 개입이 필수”라고 말했다.


“북한선 감기약처럼 흔해” “손가락 두 번 잘라봤지만…”


회복이음은 단약에 성공한 회복자 출신 보조강사들이 곳곳에 배석한다. ‘당신도 끊을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인간 백신’인 셈이다. 이날 참관한 자조모임도 회복자 출신인 한부식 경남 김해 리본하우스 원장이 진행을 맡았다. 외부 강사인 그를 중심으로 수형자 7명이 둘러앉아 고백을 이어나갔다.
부산교도소 마약류 회복이음 과정에 참여한 교육생들이 ‘나의 강점과 약점’을 주제로 그린 미술치료 작품. 송봉근 기자

자신을 ‘탈북민’으로 소개한 30대 남성은 “북한은 마약이 감기약만큼 흔하다. 친구 생일 집에서 선물로 줄 정도라 위기감이 없었다”며 “10대에 처음 손댄 마약을 한국에 정착한 뒤에도 끊지 못해 어린 딸의 돌도 못 보고 감옥에 왔다. 이젠 딸을 생각해 끊고 싶다”고 고백했다.

“손자뻘들과 옥살이하는 신세가 가슴 아프다”며 운을 뗀 백발의 60대 남성은 “손가락을 두 번이나 잘라봤지만 번번이 단약이 어려웠다. 늦었지만 변하고 싶다”고 털어놨다. 이승욱 박사는 “이처럼 각자의 경험을 털어놓으며 자신을 마주 보고 서로를 격려하는 과정은 중독 재활의 기본”이라며 “실제로 ‘이 좋은 걸 왜 끊냐’던 초범이 다른 이들의 망가진 삶을 간접 체험하면서 ‘정말 무서운 물질인 걸 알았다’며 변화한 사례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교정본부가 회복이음 누적 수료자 43명의 교육 효과를 측정한 결과, 단약효능감이 59.5점→81.9점으로 교육을 받지 않은 통제집단(77.6점→75.5점) 대비 크게 올랐다. 법무부는 상반기 중 청주여자교도소와 광주교도소로 회복이음 과정을 확대할 예정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마약 청정국 지위를 회복하려면 강력한 단속·처벌과 지속적인 치료·재활 투트랙이 필요하다”며 “최종적으로는 민간 병원과 재활시설 등 지역사회 연계를 통해 출소 후에도 안정적인 단약을 지원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부산=김정민 기자 kim.jungmin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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