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기레기와 의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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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 희망이 뭔지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던 나이였을 무렵부터 내 꿈은 기자였다.
초등학생 때 신문활용교육(NIE) 열풍이 불면서 부모님이 사설을 하나씩 잘라 노트에 붙여주셨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사설을 요약하고 내 견해를 적는 습관을 들였던 기억이 난다.
밥그릇 때문에 환자를 외면한 일이 아니었다고, 대한민국 의료를 걱정해 내린 결정이었다고 이야기하려면 논의 테이블에 앉아서 국민에게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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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 희망이 뭔지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던 나이였을 무렵부터 내 꿈은 기자였다. 초등학생 때 신문활용교육(NIE) 열풍이 불면서 부모님이 사설을 하나씩 잘라 노트에 붙여주셨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사설을 요약하고 내 견해를 적는 습관을 들였던 기억이 난다. 신문과 함께 자라며 자연스럽게 키운 꿈인지,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사명감에서 출발한 꿈인지 그 시작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줄곧 기자를 동경하면서 자랐던 건 ‘좋은 일을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그렇게 기자가 됐다. 비슷한 시기 대기업에 들어간 친구들은 나와 다른 연봉을 받으며 성과급을 어디다 써야 할지 고민했다. 고시에 붙은 친구들은 본인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직급이 낮은 직원들을 보며 조직 생활을 고민했다. 돈, 그리고 명예라고 부르는 것들이었다. 물론 퇴근 이후 어떤 필라테스 학원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보장된 일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비교하자니 연봉도 명예도 워라밸도 내세울 게 하나 없어 자존심이 퍽 상하는 날도 많았다. 그래도 내가 쓰는 기사는 돈이나 명예, 워라밸 같은 것들로 쉽게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믿음이 깨진 건 세월호 참사 때다. 정확히는 온라인에서 ‘기레기’라는 표현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당시 현장에서 취재해 보내는 모든 기사에는 내용과 상관없이 ‘기레기’라는 악플과 조롱이 달렸다.
최근 의사를 비하하는 ‘의새’라는 단어를 접하면서 그때가 겹쳐졌다. 기레기와 의새는 모두 멸칭(蔑稱)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기레기는 보편화됐고 의새는 의·정 갈등 속에서 새롭게 등장했다는 것 정도다. 기레기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나타난 일은 아니겠지만, 그사이 기자 지망생은 줄었고 직업 자체에 대한 자존감도 크게 떨어졌다. 지난해 12월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로 기자들의 트라우마에 대해 얘기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참석자들은 기레기라는 악플에 취재 활동이 위축된 경험이 있다고 털어놨다. 의새라는 조롱이 멈추지 않는다면 의사들 역시 비슷한 미래를 겪게 될 수도 있다.
이미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한 ‘빅5’ 대형병원 교수는 “환자를 보면 ‘이 환자가 혹시 의새라는 댓글을 단 사람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 때가 있다”고도 했다. 의사와 환자 사이 중요한 ‘라포’(유대관계)에도 금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멸칭이 주는 교훈도 있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기자들을 향한 비판과 자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고, 이후 기자들은 참사 관련 보도 방식에서도 여전히 부족하긴 하지만 개선 노력 중이다. 의사들도 한 번쯤은 되돌아봐야 할 시점인 것은 분명하다. 의료계는 의새라는 표현이 단순히 정부 당국자의 발음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실제로 의사 집단행동 사태 초반 의료계에서는 싸늘한 국민 여론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는 자성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의료계 내에서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줄어들고 있다.
첫걸음은 대화 테이블로 나오는 것이다. 밥그릇 때문에 환자를 외면한 일이 아니었다고, 대한민국 의료를 걱정해 내린 결정이었다고 이야기하려면 논의 테이블에 앉아서 국민에게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타이밍을 놓치고 나면 멸칭을 바로잡는 시간마저 놓치게 된다. 이미 10년 넘게 기레기라는 표현이 기자들을 무력하게 하는 독버섯이 됐음을 목격한 바다. 직업의 숭고한 가치가 누군가 쉽게 뱉어내는 한 단어로 무너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의사들도 그 숭고한 가치를 환자 곁에서 다시금 증명해야 할 때다.
김유나 사회부 차장 spr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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