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밝은 네온사인 빛”

문지민 매경이코노미 기자(moon.jimin@mk.co.kr) 2024. 5. 9.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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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안충국 작가 ‘저 너머의 형태’ 전시회
마곡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6월 28일까지
무제 캔버스,시멘트, 동, 116.7x91.0cm 2024
‘탈북자’라는 단어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지. 사선을 넘어 왔겠구나, 한국에 들어와서도 순탄하지 않은 나날을 보냈겠구나, 지금도 역시 신산한 삶을 살고 있겠구나,..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전업작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30세 청년 안충국 작가는 세가지 문장에 묘하게 걸리면서도 또 묘하게 걸리지 않는다. ‘탈북’이라는 단어로 규정지어지고 싶지 않다고 온 몸으로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또 ‘탈북’을 떼어놓고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12살에 아버지가 먼저 탈북을 했고 아버지 연락을 받아 15살 때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3월 1일 아직 얼어있는 두만강을 걸어서 건너는데, 가끔 얼음이 깨지면서 ‘철렁철렁’ 소리가 나면 혹여 들킬까 얼마나 떨었던지...”

어디로 향하는가 캔버스, 시멘트, 동 90.9x72.7cm 2024
함경북도 온성에서 살다 15살 때 라오스한국대사관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안 작가는 두만강을 건너기까지 단 한번도 자가용을 본 적도, 버스를 타본 적도 없다. 그뿐인가. 정규학교도 제대도 다니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가 떠난 후에는 학교에 가는 대신 집안일을 도우며 살았다. 그런 생활이 이상한 것인지도 몰랐다는 안 작가가 유일하게 집착하며 매달린 대상이 그림이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다양한 미술도구를 사모았던 아버지가 탈북하면서 그림 공부를 하던 사촌누나에게 미술도구를 모두 주고 떠났다. 그걸 고마워한 사촌누나가 안 작가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사촌누나 집에서 한동안 더부살이를 하던 시절에는 매일 새벽 6시부터 밤 11시까지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학교를 다니는둥 마는둥 하던 15살 소년이 원래 살던 곳과는 천양지판 다른 서울에 와서 중학교 2학년생이 됐다. 시공을 가르지르는 상상초월 경험은 가름조차 되지 않는다. 학업은 따라가기 어렵고, 친구들은 따돌리고, 먼저 탈북한 아버지는 한국에서 새 가정을 이루고 있고,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와중에 이번에도 그림이 안 작가에게 한줄기 빛이 됐다.

잊히지 않는 여린 기억 mixed media 116.8x91.0cm 2022
그림에서 위안을 얻었지만 그림을 계속 그리기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재료 살 돈이 없었다. 그림의 길을 포기하려 할 때 안 작가 재능을 눈여겨본 학교 미술 선생님이 발 벗고 나섰다.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주선해주고, 학교에 있는 재료를 마음껏 쓸 수 있게도 해줬다. 그렇게 홍익대 미대에 입학하고 꿈꾸던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마곡에 위치한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안 작가의 개인전 ‘저 너머의 형태’가 6월 28일까지 이어진다. 이 전시에서 안 작가가 천착해온 원 시리즈, 벽 시리즈, 빛 시리즈 등 세가지 시리즈의 작품을 모두 만나볼 수 있다.

잊히지 않는 여린 기억2 mixed media 116.8x91.0cm 2022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는 북한에서 깜깜한 밤에 길을 가려면 늘 달빛을 의지해야 했어요. 당시의 달빛은 그저 달빛이 아니라 어디로 가라고 끊임없이 알려주는 인생의 나침반이었죠. 그 광경과 느낌은 십여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제 삶을 관통하는 선명한 기억이예요.”

그래서인지 안 작가의 원은 ‘원’이지만 완벽한 원은 아니다. 어딘가 이지러지고, 어딘가 슬픔이 어려있고, 그러면서도 초연한 정서는 그저 관객의 느낌일까.

어디에… 캔버스,시멘트, 동, 크레파스, 116.7x91.0cm 2024
‘빛’ 시리즈는 ‘원’ 시리즈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또다른 세계다.

“처음 중국에 도착했을 때 환하고 밝은 네온사인 빛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 세상이 있을거라고 상상도 못해봤으니까요. 그때의 놀라움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느낌을 아직 제대로 구현해 내지 못해 아쉽지만, 그래도 ‘빛’ 시리즈를 평생 가져가겠다 다짐하는 이유입니다.”

빛2- 캔버스, 시멘트, 망, 유성페인트 40.9X31.8cm 2024
‘벽’ 시리즈는 최근 전념하고 있는 시리즈다. 재료로 페인트를 선택한 것부터 독특하다. 캔버스 천 위에 시멘트를 들이붓고 시멘트 위에 그물망을 올려 고정시킨다. 캔버스에 고정되지 않고 계속 떨어져 나가는 시멘트를 붙잡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다 찾아낸 것이 안충국만의 ‘그물망 고정법’이다. 그 위에 동을 뿌리고, 낙서를 하고, 미처 굳지 않은 시멘트를 입으로 불어대고 하면서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동은 시멘트 위에서 마치 지중해 바다를 연상시키는 새파란 색으로 되살아난다. 새파란 사이사이 녹슨 자태가 처연하다.

“거칠고, 녹슬고, 흘러내리고, 낙서가 되어있고... 그런 캔버스 천이 꼭 탈북자로서의 제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북한에서 15년 살았고, 한국에서 꼭 그만큼인 15년을 살았지만 여전히 저는 어린 시절의 감성과 질감에 매여 있는 것 같아요. 세상이 탈북자 화가가 그려줬으면 하는 북한 실상을 고발하는 사실주의 작품 대신 뭔가 모던해 보이는 추상화 작업을 하고 있지만, 그 추상화가 결국은 ‘탈북자’라는 정체성 안에서 비로소, 오롯이, 온전해 지고 있으니, 참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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