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데없는 사랑 타령, 인생 기초는 여기서부터

구교형 2024. 5. 8.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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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누구나 사랑의 씨앗만은 갖고 태어난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구교형 기자]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는 명언이 나온다. 자료사진.
ⓒ 픽사베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무엇이냐 물으면 사람들은 대개 '행복'이라 답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행복이 무엇이며,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그것만큼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전혀 모르거나 낯선 것도 아니다.

우선 우리는 대개 행복을 위한 첫째 조건으로 돈을 말한다. '뭐니 뭐니해도 머니!(money)'라는 말이 보편적 진리이고,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최고의 덕담으로 여겨지는 이유도 바로 그래서이다. 이 연재에서 세 번에 걸쳐 경제와 먹고사니즘을 이야기한 것도 마찬가지다.

도통한 것 같은 사람일수록 이 부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건너뛰고 다음 단계로 올라가려는 것은 그리 지혜롭지도, 효과도 없는 일이다. 생존의 기본욕구를 충족하는 것은 행복을 향한 밑바탕임은 틀림없다.

먹고 살아가는 생존의 기본욕구 위에 우리는 정치, 경제, 평화 등 여러 사회적 구조물을 세워간다. 이처럼 우리는 대개 자기 눈앞에 있는 현실을 직면하고 그 조건과 상황을 개선, 극복하는데 가장 많은 공을 들인다.

문제는 사람이 현실적 과제를 해결하고, 눈앞의 상황을 개선하고, 생존의 기본 조건을 마련하는 게 인생과 행복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기 쉽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리 생존의 욕구를 충족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행복하거나 만족하지 못한다. 이게 바로 이 연재의 두 번째 주제인 '사랑하라'에 해당한다.

사랑은 뭘까? 사랑의 기본 특성은 관계의 욕구이며, 관계는 마음의 주고받음, 곧 이심전심을 통해 세워진다.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의 욕구가 얼마나 큰가? 그래서 타자와 마음을 나눌 수 없는 사람은 삶이 시들고, 의욕이 없고, 모든 게 무너져버린다.

그러나 인간사의 비극은 관계를 잘 지키는 것보다, 생활 조건 개선에만 거의 전부를 걸고 그걸 행복이라 믿으려는 것이다. '좀 더 넓은 집에 살면, 좀 더 큰 차를 타면, 연봉이 두 배로 뛰면,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건 국가나 집단도 마찬가지다. '국내총생산(GDP)이 올라가면, 세계 ○대 ○○국가가 되면, 우리나라는 더 행복해질 것이다.'

물질적 지표나 상황과 조건의 개선이 행복과 무관하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객관적 조건은 행복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으며 특히 객관적 상황 지표가 매우 열악할수록 그것의 개선은 행복에 직결될 수 있다.

잊고 살아간다

그러나 객관적 조건의 개선이 오직 유일무이한 목표가 되거나 정도 이상을 지나면 도리어 행복과 만족에 역행할 수도 있다. 더 궁극적인 목표이며 숨은 지표인 관계를 한없이 방치하거나 소홀히 하기 쉽다는 말이다. 그리고 관계 회복은 대충 말로 때우거나, 자기가 원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조건을 우선 개선하고 나면 관계는 쉽게 따라올 것이라 믿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관계나 사랑은 그렇게 소홀하고, 하찮게 취급되어도 좋은 게 결코 아니다. 그건 사람이 병약해지거나 죽음을 앞두었을 때 갖는 뼈아픈 후회로도 충분히 확인된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자신이 좀 더 과감한 투자로 얻지 못한 주식 대박을 아쉬워하거나 강남 아파트를 사지 못해 놓친 엄청난 시세차익에 눈물 흘리지 않는다.

1000명의 죽음을 지켜본 일본의 호스피스 전문의 오츠 슈이치는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 다섯가지>(21세기북스)에서 뒤늦게 발견한 가장 소중한 것들을 보여준다. 스물다섯 가지의 사연들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더라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조금만 더 겸손했더라면, 친절을 베풀었더라면… 치료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했더라면, 신의 가르침을 알았더라면."

어쩌면 우리가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왔던 이야기인지 모르나 그 말을 들으면서도 대개 우리는 그 교훈을 다시 잊고 살아간다. 이는 내가 목사로서 상투적으로 편히 하는 말이 아니다. 나 자신이 나이 50이 넘어 사랑에 얼마나 서투르고 관계에 소홀했는지 깊은 회한 속에 깨달은 고백이기도 하다. 젊어서부터 성취욕에 사로잡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모든 의미를 두며 살았다.

더구나 그 일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가치와 의미에 관련되었기에 힘들수록 그 성취감은 더했다. 그러나 그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내 마음에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자주 빠져 있었다. 옳고 그름, 일의 잘하고 못함을 늘 따졌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어주거나 관계에는 자주 서툴렀다.

그래서 일로 만나는 관계는 편했지만, '그냥'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건 한없이 불편했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3장 3절)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들이는 시간은 소득 없이 허비하는 것처럼 느껴 아까웠다. 뒤늦게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며,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후에야 지난 시간이 얼마나 아쉽고 안타까운지 알게 되었다. 그 후 노숙인 쉼터 시설장을 하면서, 대리운전과 택배 노동을 하면서 좀 더 의식적으로 사람에게 집중하고 마음 나누는 일에 힘을 모았다. 그 작은 집중과 노력으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 게 나로서는 신기하고, 놀랍기만 하다.

사실 철이 든 뒤부터 한결같은 내 관심은 사회, 세상의 변화에 있었기에 지금도 시사적인 문제들에 한 마디씩 보태는 것은 내겐 숨 쉬듯 자연스럽고,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과제의 중심에 관계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풀리지 않는 여야의 갈등도 둘 사이에 이념이나 정책이 정말 하늘과 땅만큼 달라서라기보다 이미 싫고 적대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작은 차이라도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여기서부터
 
 사람은 누구나 사랑의 씨앗만은 갖고 태어나는 것 같다. 자료사진.
ⓒ 픽사베이
사람은 누구나 사랑의 씨앗만은 갖고 태어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을 애써 살피고, 가꾸는 여부에 따라 결국 천차만별이 될 것이다. 똑같은 씨를 뿌려도 농부가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풍성한 열매가 될 수도, 괜히 지나다니기에도 불편한 잡초가 될 수도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과 노력이 요구된다. 우리는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기 위한 시간과 물질, 열정의 투자를 아까워하지 않는다. 외국어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학원에 다니고, 근육질 몸매를 만들기 위해 힘든 운동을 마다하지 않고, 취업에 꼭 필요한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시간을 짜낸다.

그러나 사랑이 가장 소중하고, 좋은 관계가 절실하다고 쉽게 말하면서도, 사랑을 배우고, 관계를 키우기 위한 공부나 투자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생의 행복에 가장 중요한 기초를 소홀히 하면서 건물만 높이 올리려는 것과 같다.

다행히 언젠가부터 종교기관이나 단체, 기업, 학교 등에서도 관계를 증진하고, 사랑을 키우기 위한 강좌, 훈련이 늘어났다. 그러나 단편적인 정보나 일시적인 표현 훈련 정도를 넘어서는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노력과 실제적인 투자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아는 한 모든 타자와의 관계, 사랑의 출발점은 이심전심, 역지사지다. 내가 싫은 건 저 사람도 싫어한다. 그러니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좋은 건 저 사람도 좋아한다. 그러니 그에게도 보장되어야 한다.

동서양의 지혜를 대표하는 예수와 공자에게서 동일한 교훈을 발견하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 우리의 관계 회복은 여기서부터 시작함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장 12절)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논어 안연편 및 위령공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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