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롱함을 넘어… 우주 만물의 원리를 담다

손영옥 2024. 5. 8.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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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작가’ 김창열 3주기 회고전
‘물방울 작가’ 김창열 3주기 회고전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영롱함을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열리고 있다. 전시는 ‘물방울 그림’으로만 단순하게 요약되는 그의 회화 세계에 얼마나 다양한 조형적 실험과 변주가 있었는지를 조명한다. ‘물방울’(2012, 캔버스에 유채, 162×112㎝). 갤러리현대 제공


1974년 프랑스 파리 교외 김창열(1929∼2021·사진)의 작업실을 찾은 화가 박서보(1931∼2023)는 깜짝 놀랐다. 캔버스마다 알알이 물방울이 맺혔는데, 그야말로 어떤 배경도 없이 물방울뿐인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후배 박서보는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사방의 벽이 온통 물방울로 가득 찼더군. 흘러내리면 집에 홍수라도 날만큼 말이야. 아이 하나쯤 익사할 거 같던데.”

‘물방울 작가’ 김창열 3주기 회고전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갤러리현대는 1976년 파리에서 활동하던 김창열의 개인전을 열어주며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파리로 건너간 지 11년만으로 당시 그의 나이 47세였다. 이후 생애 마지막인 14번째 전시(2020)에 이어 이번에 15번째 전시를 연 것이다.

김창열의 캔버스 화면에 물방울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42세 때인 1971년이다. 마구간을 작업실로 사용하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해 어느 날, 캔버스를 재활용하려고 천에 물을 뿌려두었던 그는 캔버스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발견하고 ‘이거군!’ 싶었다. 그는 당시의 기쁨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것은 하나의 점이면서도 그 질감이 어떤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새로운 발견이었어. 기적으로 느껴졌어.”(『공간』 1976년 6월호)

발견의 기쁨이 너무 깊고 강력했을까. 그는 이후 줄기차게 물방울만 그렸다. 그래서 ‘평생 물방울만 그린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여기에는 비아냥거림이 다소 깔려 있다. 자기 혁신이 없었다는 의미로도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평생 물방울만 그린 작가’라는 수식어에 붙는 부정적 뉘앙스에 대한 오해 풀기를 겨냥한다. 전시장에는 물방울이 탄생한 시기인 40대 중후반의 1970년대 작품부터 80대 말년인 2010년대 제작된 근작까지 김창열 화백의 예술 여정을 회고할 수 있는 주요 작품 38점이 나왔다. 이를 통해 묵묵히 실험한 물방울의 다양한 표현과 그것이 높인 표면과의 관계, 즉 조형언어의 실험 여정을 살핀다. 전시 제목이 ‘영롱함을 넘어서’인 것은 그래서다.

50년 화업을 관통하는 물방울 회화의 다양한 면모를 일별할 수 있다는 게 전시의 매력이다. 물방울은 단순히 맺혀 있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너무나 진짜 같이 그려져 만지면 톡 터질 것 같은 물방울 이미지는 캔버스 표면에서 흐르기도 하고 흡수되기도 한다. 한 화면에서 물방울의 점도와 흐르는 속도가 서로 다르거나 적용되는 중력이 다르게 표현되기도 한다.

‘회귀’(1997, 캔버스에 먹과 유채, 162.5×130㎝). 갤러리현대 제공


물방울 회화는 물리적인 형상을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놀랍다. 이를테면 캔버스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물방울이 딱 하나 맺혀 있는 회화도 있는데, 물리적으로 저렇게 큰 물방울이 중력을 거슬러 매달려 있을 수 없다. 이렇듯 물방울 회화는 초현실의 세계로 나아간다. 공중에 뜬 물방울들의 그림자가 비치는 회화 역시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라 재현 너머로 나아가고자 했던 화가의 조형적 실험 의식이 읽힌다.

2층 전시장에서는 캔버스 천 대신에 한지를 사용한 작품들도 볼 수 있다. 1972년 프랑스에서 전위적인 청년 작가들의 전시회인 ‘살롱 드 메(Salon de Mai)’에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이 처음 소개됐을 때 초현실주의 시인 알랭 드 보스케가 놀라워하며 “김창열의 물방울은 최면의 힘을 갖고 있다”고 평한 이유를 알 거 같다.

지하 전시장에서는 80년대 이후 제작된 ‘회귀’ 연작을 만날 수 있다. 작가가 천자문과 도덕경 내용을 손수 쓴 한자(漢字) 위에 맺힌 물방울은 각각 우주와 자연을 상징하며 캔버스 위에서 하나가 된다. 작가는 앞서 1975년에 신문이라는 오브제 위에 물방울을 그려 넣기도 했다. 이후 물방울이 얹힐 표면으로 천자문과 도덕경 등 우주 만물의 원리를 담고 있는 언어를 선택한 것이다.

김창열 작가가 2021년 타계했을 때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는 부고 소식을 전하며 신문지면 위에 물방울 그림을 올리는 놀라운 편집을 했다. 작가가 생전에 현지 신문에 그린 물방울 그림을 오마주했던 것이다. 김창열은 후배 백남준(1932∼2006)의 도움으로 1969년 제7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했고 이를 계기로 파리에 정착했다. 프랑스 여성을 아내로 얻었고, 이후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했다. 프랑스 정부가 주는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1996년에,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2017년에 받았다.

2021년 1월 작가가 타계한 직후 작품 가격이 치솟으며 생전 최고 기록을 연신 갈아치웠다. 그해 2월 서울옥션 서울 경매에서 1977년 작 ‘물방울’이 10억4000만원에 새 주인을 찾은 데 이어 5월에는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1978년 작 ‘CSH 1’이 985만 홍콩달러(약 14억원)에 낙찰됐다. 이번 전시에도 10억원 대작이 한 점 나왔다. BTS 멤버 RM의 소장품도 전시장에 나왔다. 6월 9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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