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뜨개질 카페에서

2024. 5. 8.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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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라 신한카드 빅데이터 연구소 연구원

뜨개도 인생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엮고 꿴 것은
아름답게 우리 안에 남는다

언젠가 붉은색 실로 뜨개질을 하는 사람을 아주 오래 바라본 적이 있다. 건물 복도에 걸터앉아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뜨개질을 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신비해 눈을 뗄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녀의 손 덕분에 세상에 붉은색이 조금씩 더 많아졌고, 한 사람의 시간이 색으로 태어나는 걸 보았다. 그때 뜨개질이 시간을 엮는 일임을 배웠다. 내가 살아온 시간도 저렇게 예쁘고 따뜻하게 정돈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얼마 전 업무차 참석한 트렌드 세미나에서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뜨개질이 인기라는 말을 들었다. 도파민과 숏폼 중독의 시대에 그것을 해독하기 위한 몰입의 행위로 뜨개질과 자수 같은 정적인 활동이 주목받는다고 한다. 강연자는 서울 연희동의 ‘바늘 이야기’라는 털실 전문점의 카페에서는 모두 뜨개질을 하고 있다며 “시간 되시면 꼭 한 번 가보세요”라고 권했다. 예전 그때처럼 뜨개질하는 풍경을 다시 오래 보고 싶었지만, 과연 지금의 내가 갈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여름이면 세 돌이 되는 아이를 키우는 내가 육아를 하며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감사함’이라 쓰고 싶은데 최근엔 ‘상실감’을 더 크게 느꼈다. 아이를 키우며 나와 관련한 수많은 것이 사라져버렸고 특히 ‘내 시간’이 사라져버렸다. 현자들은 늘 현재를 보라지만 나는 이제는 아득해진 과거와 언젠간 이보다 낫길 바라는 미래를, 그러니까 ‘언젠간 전처럼’을 기약하며 살아간다. ‘언젠간 전처럼’ 저런 카페를 훌쩍 혼자 가볼 수 있을까.

시간이 최고 자산인 요즘, 비용만 지불하면 대부분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그래도 아직 돌봄의 시간은 줄이지 못했다. 놀이공원 입장, 가사노동부터 고지능 업무까지 추가 비용만 지불하면 더 빨리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럼에도 여전히 돌봄 시간을 단축해 줄 기계나 기술은 부족하다. 돌봄의 영역만큼은 온전히 또 여전히 나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긴 돌봄이 시작된 연휴 동안 모두가 뜨개질하는 그 풍경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져 바로 아이와 함께 ‘뜨개질 카페’로 향했다. 평소라면 떠올리지 않을 목적지이지만 그날은 꼭 가보고 싶었다. 카페의 풍경은 상상했던 대로였고 아이도 새로운 풍경을 흥미로워하며 함께 음료를 마셨다. 그곳에서는 정말 다양한 연령대와 국적의 사람들이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니 ‘디톡싱’이나 ‘몰입’과는 좀 다른 풍경이 보였다. 각기 다른 실력의 사람들이 모두 다른 색과 굵기의 실로 저마다의 모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의 곁에 그들이 만들어낸 시간의 축적이 놓여 있었다.

그 풍경이 내게 상실을 다시 정의하게 했다. 나는 잃어버린 것이 없다. 내가 꿴 시간의 축적은 고스란히 어딘가에 예쁜 직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시기는 무언가를 상실하는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실로 새 모양을 뜨기 시작한 단계일 뿐이다. 우리 삶에는 실을 갈아 끼워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고, 그 교체의 순간에선 누구나 서툴고 낯설 수밖에 없다. 실은 달라져도 과거에 내가 꿴 것들은 고스란히 내 옆에 남아 있다. 현재는 그것들과 이어져 있기에 우리의 현재는 범위가 넓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물었다. “엄마 왜 아까 옆에 앉은 누나가 ‘이게 내 맘대로 잘 안 되네’라고 했지?” 난 아이가 그 문장을 기억한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답한다. “누나가 처음이라 서툴렀나 봐. 내 맘대로 안 돼도 포기 않고 계속 뜨면 뭐라도 남을 거야.” 뜨개도 인생도 아무것도 내 맘대로 되지 않아도 우리가 엮고 꿴 것들은 아름다운 형태로 우리 안에 머물 거란 얘기도 나눴다. 그리고 이 짧은 대화로도 육아가 서툰 나의 지금과 사랑스러운 아이의 지금이 연결되는 걸 느꼈다. 그 연결들이 내가 몰랐던, 그러나 바라던 예쁘고 따뜻한 태피스트리를 만들었음은 분명하다.

정유라 신한카드 빅데이터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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