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에 문화를 담다 [조남대의 은퇴일기(51)]
산업시설이 여러 요인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과거에는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요즈음에는 도시화나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기피시설로 낙인찍혀 쫓겨난 신세가 되기도 한다.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쩔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세월을 거스를 수 없듯이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꽃비가 내리고 연녹색으로 물들어가는 마포구 성산동 월드컵공원 주변 매봉산 산책로를 걷다 보면 노출콘크리트로 지은 커다란 탱크가 보인다. 말로만 들어왔던 문화비축기지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를 위해 인근에 경기장이 건설되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석유비축기지는 위험천만의 기피시설로 찬밥 신세가 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지 않은가. 자동차 4백만 대를 주유할 수 있고, 서울시민이 한 달간 사용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기름이 저장된 곳이었는데 어찌하겠는가. 한순간에 폭탄 같은 존재로 낙인찍혀 폐쇄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41년간 비밀리에 관리되어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던 1급 보안시설인 기름탱크를 텅 비운 채 15년을 무료하게 지내야 했다. 다행히 2017년 도시재생 정책에 따라 복합문화공간인 문화비축기지로 이름표를 바꿔 달면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휘발유와 석유, 등유로 가득 차 있던 탱크 다섯 개가 문화공간으로 변모하여 시민들에게 전시, 공연, 포럼, 워크숍과 같은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그 옆에 탱크 모양을 본뜬 공간을 신축하여 카페와 커뮤니티센터를 만들어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지름이 15~38미터이고 높이가 15미터나 되는 원통형 탱크가 이제는 저마다의 특색을 갖춘 문화시설로 탈바꿈했다. 냄새나는 기름 탱크라고 폐기될 뻔했는데 고진감래라더니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견디온 보람이 있었다. 벌써 소문이 해외까지 널리 펴졌는지 외국 관광객들도 찾아와 작품을 감상하거나 특이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애국자가 따로 있나. 아우러진 모습을 보며 뿌듯하고 자랑스러워 어깨에 힘이 절로 들어간다.
문화비축기지를 둘러보는 동안 특히 관심을 끈 곳은 다섯 번째 탱크인 영상미디어관에서 열리고 있는 ‘암태도’ 관련 전시회다. 전남 신안군에 있는 작은 섬으로 1923년∼1924년까지 이곳에서 발생한 소작인들의 투쟁을 조명한 것이다. 8할에 이르는 과도한 소작료에 반발하여 4할로 내려달라는 농민들의 애절한 몸부림이 실감 나게 그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소작인들의 단결과 비폭력 저항으로 지주들에 대항하며 승리한 역사적 사건이다. 올해로 백 년째, 한 세기가 지났건만 그때나 지금이나 잘 살고자 하는 싸움은 치열하다. 회화, 조각과 영상작품 같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농민들의 고난과 쟁취로 점철된 힘의 작용과 반작용, 팽창과 긴장이 가슴속으로 전해진다. 원색적이며 과감한 색채표현과 거칠고 직선적인 필체 속에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흘리는 피와 땀과 눈물이 그대로 스며있어 몸이 으스스하게 소름 돋는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항일 운동의 하나로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정신을 이어가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용선 작가의 노력도 만만치 않다. 그는 2년에 걸쳐 양평 작업실과 암태도를 오가며 주요 인물들을 연구하고 자료를 찾아내어 현대미술 작품으로 표현하였으니 대단하지 않은가. 특히 원형전시실의 높다란 벽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시시각각 다양하게 뿜어져 나오는 영상과 음향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그믐밤 같은 암울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더욱 실감 나게 한다. 외부에 거꾸로 세워진 ‘농민상象’에 발을 멈춘다. 그들의 소작쟁의가 얼마나 치열했으면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머리를 땅으로, 다리를 하늘로 향한 채 견뎌야 했을까. 이 정도면 잊혀진 우리의 저항 정신과 사회적 정의를 억지스럽지 않게 깨우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시의 역사적 사건들이 예술을 통해 되새겨지고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할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곳 문화비축기지는 산업시설이 문화시설로 바뀐 좋은 사례다. 석유 중심의 산업화시대에서 친환경과 재생, 문화가 중심이 되는 미래로 넘어가는 공간이다. 4만 평의 공원에 설치된 탱크에서 진행되는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2019년에는 77만 명이 다녀갔으며, 많을 때는 하루 평균 1만2천 명이 찾아오기도 했단다. 특히 3번 탱크는 석유비축기지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하여 역사적 배경과 경제 상황을 알려주는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되었다. 문화융성 시대를 맞아 얼마나 다행스러운 조치인지 서울시의 높은 안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발맞추어 지구촌 곳곳이 변하고 있다. 런던의 ‘데이트 모던’은 발전소였던 건물을 현대미술관으로 개조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 전시를 통해 주요 관광명소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베를린의 쿤스트할레는 마가린 공장이었으나 미술 전시공간으로 개조되어 베를린의 예술과 문화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서울 성수동의 뚝섬미술관도 창고를 전시문화 공간으로 변신시킨 곳으로 다양한 예술작품 전시를 통해 감동을 선사하는 새로운 문화적 명소로 주목받는 중이다. 탱크에 문화를 담다니 예술이 깨어나 저돌적으로 살아 숨 쉬는 분위기에 매혹되는 하루였다.
메마름의 끝에 단비가 내리듯 제조업 공장이나 창고가 카페, 전시실, 스튜디오로 탈바꿈하여 여유 공간으로 바뀌는 것을 주변에서 본다. 문화비축기지의 탄생은 사회적, 문화적 가치 창조에 이바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산업을 제치고 문화를 탐하는 문화비축기지에 애착을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닌 듯싶다. 도심 주변의 산업시설이 문화시설로 탈바꿈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전 세계 많은 도시에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는 것은 아닐는지. 이를 계기로 우리 가슴속에도 문화를 차곡차곡 채워 넣을 수 있는 비축기지를 하나씩 만들어 두면 어떨까.
조남대작가 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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