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에서 벼농사 짓던 아버지가 가장 기뻐할 꽃

김은진 2024. 5. 7.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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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을 기약하는 이팝나무 꽃... 아버지도 하늘에서 반가워 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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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진 기자]

▲ 월계천 이팝나무꽃 4일, 홍성 월계천에 이팝나무꽃이 만발하였다.
ⓒ 김은진
아버지의 고향은 충남 홍성이다. 아버지의 연고지인 까닭에 나도 종종 그곳을 방문하게 된다.

4일, 홍성읍에 위치한 대교공원(대교리 411)에서 홍성천을 따라 걸었다. 대교공원 주변에는 천주교 순교성지 순례길이 있었고 화창한 날씨 덕에 이팝나무꽃은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만개한 벚꽃이 안겨주던 봄날의 설렘이 다시 느껴졌다. 녹음이 짙어지기 전 봄꽃의 앙코르송을 듣는 것 같았고 벚꽃과 철쭉꽃이 져서 아쉽던 마음이 다시 채워졌다.
 
▲ 월계천 이팝나무꽃과 유채꽃 4일, 홍성 월계천을 따라 산책을 하는 중에 이팝나무꽃과 유채꽃이 활짝 피어있다.
ⓒ 김은진
   
하얗게 꽃이 핀 이팝나무를 따라 북문교를 건너고 홍주초등학교 앞을 지나자 노란 유채꽃까지 피어나 바람 따라 흔들거리고 있었다. 더 위쪽으로 올라가자 친정부모님이 농막을 오가며 생활하시던 아파트가 보였다.

큰아이가 어릴 적, 아버지는 자전거 앞에 작은 의자를 달아 아이를 앉히고 태워주셨다. 직장생활을 하는 딸 대신 친정 부모님께서 아이를 돌봐주셨는데 자전거를 태워주면 칭얼대던 아이도 울음을 그치고 좋아했다.

주로 홍성 법원 앞 넓은 공터에서부터 월계천을 따라 자전거를 타셨다. 그때는 아이들이 아주 많았는데 지금은 인근 신도시로 이사를 간 것인지 조금 한적한 느낌이 들었다.

활짝 핀 이팝나무 꽃이 밥그릇에 수북이 담긴 쌀밥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예로부터 이팝나무에 꽃이 만발하면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다. 벼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가 가장 기뻐할 꽃이다.

고향을 찾아 농사꾼이 된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인 나의 친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으로 징용을 당하셨다. 그곳에서 광부로 일하셨는데 원폭이 투하되고 일본이 패망하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셨지만 방사선에 노출되어 고국에 돌아오신 지 일 년 여 만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후 친할머니도 원인 모를 병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주변의 친척들의 도움으로 생활하셨다. 그러나 6.25 전쟁이 터지자 모두 피난을 가면서 일찍 홀로서기를 시작하셨다.

어린 나이에 생계를 위해 서울에 올라와 이런저런 일을 하며 고생을 하셨지만 천성이 다정하고 웃음이 많아 예쁜 친정어머니와 가정을 이루셨다. 서울에 사는 동안 살림살이는 팍팍했지만 별 탈 없이 잘 지냈다.

아이들이 공부를 어느 정도 마치고 아버지의 나이가 중년을 지나자 고향으로 귀농을 하고 싶어 하셨다. 다행히 홍성과 맞닿아 있는 예산의 한 산중에 마땅한 자리를 발견하셨다. 깊은 산중에 농막을 짓고 가축을 기르셨다. 동물을 좋아하셔서 소와 염소를 돌보는 일을 재미있어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깜짝 선언을 하셨다.

"시골에 왔으니 벼농사를 지어봐야겠다."

돌투성이 산중에 마땅한 농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샘물이 차가워 농사가 잘 되지 않을 것이며 왜 사서 돈도 되지 않는 일을 하느냐고 가족들 모두 반대했다. 하지만 아버진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묵묵히 실행에 옮기셨다.

흰 쌀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는 선물

얼마 뒤 아버지는 중장비로 땅을 고르고 삽과 곡괭이로 돌을 골라내어 2단짜리 논을 만드셨다. 모내기를 위해 물을 댄 논은 얕은 호수처럼 보였다.

자박하게 물이 찬 논 위에는 검푸른 뒷산의 모습이 비치었고 흰 구름 한 조각이 새로운 놀이터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찾아들기도 했다. 가끔씩 저녁 무렵 하늘을 뒤덮으며 화려하게 펼쳐진 주황빛 노을이 네모난 논 위에 찾아들 때도 있었다. 반려견인 검둥이와 누렁이는 먹이를 찾으러 들어온 꿩을 잡으려는지 첨벙이며 뛰어다녔다.

첫 해 가을 수확을 앞둔 논두렁 위에 서서 흐뭇한 얼굴로 황금색 벼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이 난다. 그리고 농협에 수매하고 남은 몇 가마니의 쌀을 현관 앞에 쌓아 놓으며 어머니에게 아래와 같이 탄식을 뱉으셨다고 한다.

"내가 이게 없어서 어릴 적 그렇게 울었던가."

아버지에게 쌀농사는 돈벌이가 아니라 배고프고 외로웠던 기억을 지우는 일이었나 보다. 그리고 논을 만드는 일은 아버지에게 자신과 후손들이 배고픔으로 울 일은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준 일이었던 것 같다.

초록색 잎들 위에 뭉게뭉게 피어오른 이팝나무 꽃을 바라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치 천상 위를 산책하는 것 같아 이 꽃구름과 연결된 하늘 위 구름에서 웃고 계실 아버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버지, 올해 벼농사는 풍년일 것 같아요."  
 
▲ 홍성 월계천 이팝나무 4일, 구름처럼 피어난 이팝나무꽃
ⓒ 김은진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작가의 브런치에 실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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