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지대를 '비리 대학'에서 '민주 대학'으로

김삼웅 2024. 5. 6.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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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 31] 그에게는 '민주 대학 총장'이라는 명예가 따랐다

[김삼웅 기자]

▲ 강만길,단독사진 강만길 상지대 총장, 2003.6.12
ⓒ 권우성
 
'유명세'라는 것이 있다. 유명 인사에게 붙는 명예로운 호칭이다. 그는 1996년부터 동아시아 평화·인권국제회의 한국위원회 대표, 청명문화재단 이사장, 민화협 상임의장, 정부의 통일고문회의 고문, 한일문화교류정책자문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진상규명과명예회복위원회 위원, 청암 송건호 언론문화재단 이사장, MBC 통일방송정책 자문위원, 국가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장, 대통령(노무현)자문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위원회 위원장, 독립기념관 이사,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6·15 공동선언 발표 다섯 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평양) 남쪽 준비위원회 상임고문, 광복6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등 많은 자리에서 다양하고 다채로운 활동을 했다.

유명 인사라 하여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 분야들이고, 함부로 맡기도 어려운 일들이었다. 각계 유명 인사 중에는 허울뿐인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럴듯한 학벌과 학위를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실력과 집행력을 갖추지 못한 인사들이 대표적이다. 강만길은 이들과 비교하기도 아까울 만큼 진보적 역사관과 꼼꼼한 성격을 바탕으로 맡은 소임에 충실했다.

김대중의 수평적 정권 교체는 해방 반세기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는 다른 여러 분야에도 민주화를 불러일으켰다. 대학도 다르지 않았다. 민주화의 열풍은 대학가에도 불어닥쳤다. 대학마다 교수협의회가 생기고, 재단에서 임명하던 총장을 교수들이 선출하게 되었다.

강만길이 아직 정년 퇴임을 하기 전이었다. 젊은 '민주 교수'들이 학생들의 뜻을 모아 강만길을 후보로 추천했다. 학교 행정은 잘 모를 뿐만 아니라 한때 해직교수였음을 들어 한사코 만류했으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선거 과정에서 젊고 양심적인 교수들의 노력이 컸지만, 해방 후부터 뿌리 깊은 보수정당의 중요 기반의 하나였으며, 역사 깊은 보수언론의 경영주 가문이 경영하는 대학교에서 설령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해도 해직교수 출신이 총장이 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주석 1)

이 같은 사연으로 상처 아닌 상흔이 남아 있는 그에게 뜻밖에도 원주에 있는 상지대학의 총장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당시 상지대학은 대표적 사학비리의 온상으로 세간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런 오명을 씻고자 이 대학의 학생과 교수, 지역 유지 등이 뜻을 모아 강만길을 초빙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때까지 상지대학교를 잘 몰랐다. 그저 재단 분규가 있었고, 비리재단이 교수와 학생들의 투쟁에 의해 일단 쫓겨났으나 아직도 구재단과 교수·학생 사이의 쟁투가 계속되고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직 교수였던 연세대학교 부총장을 지낸 김찬국 교수가 총장을 지냈고, 그 뒤에 역시 해직 교수였던 서울대학교 한완상 교수가 총장을 하다가 교육부총리가 되어 갔다는 정도밖에, 한 총장 후임이 부임했는지 아닌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주석 2)

학원 재벌은 군사독재의 사생아 중 하나였다. 권력에 줄을 댄 비교육자들이 대학을 설립하거나 기존 대학의 이사진에 진출하여 대학을 통째로 삼키거나 세력을 형성했다. 그 대표적인 비리재단이 있는 곳이 상지대학이었다.

김문기 씨가 청암학원을 인수하여 상지학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원주대학을 폐교하고 상지대학교를 개교하여 운영한 동안, 즉 1973년 이후 약 20년간 여러 가지 학교 운영상의 물의와 분규가 있었다. 그러다가 1993년에는 공금횡령과 금품수수를 통한 부정 입학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업무방해죄와 '특가법(횡령)' 위반으로 징역 3년이 선고되었다. 김문기 씨가 구속될 때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군사정부가 끝나고 김영삼 문민정부가 성립된 직후였는데, 당시 그는 3당 합당으로 성립된 여당 민주자유당의 국회의원이었다. (주석 3)

강만길은 2001년에 상지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2005년까지 재임하면서 투명한 학사행정을 폈다. 구재단 측의 음해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강만길은 대학 정상화를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10년간 이어져 오던 관선 임시이사 체제에서 벗어나 정이사 체제로 전환했다. 구재단 측의 반발을 뿌리치고 임시 이사진을 모두 퇴진시켰다. 국정의 민주화가 진척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오랫동안 뿌리를 깊이 내린 구재단 측의 인적·물적 기반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다.

필마단기로 취임했기에 그를 도와줄 인맥이 거의 없었다. 온갖 모해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길은 공정한 업무처리와 투명한 경영이라 믿었다. 일찍이 경실련에 몸담았던 그에게 공직자로서의 '공정'과 '투명'은 절대적인 가치였다. 그가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조심했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를 들어 본다.

좀 구차스러운 일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니 밝혀 두려 한다. 자매결연 관계로 몽골아카데미에 갔을 때의 일이다. 학교에서 모든 비용을 받아 갔으나 정작 가서 보니 호텔비용 일체를 몽골아카데미에서 부담하는 것이었다. 돌아와서 학교에서 받아 간 출장비 중 그만큼의 비용을 경리과에 반납했다.

구차스러운 일 한 가지를 더 말해야겠다. 부임한 얼마 후 어느 지방 대학교의 요청으로 강연하러 가면서 총장 차를 타고 갔는데, 지방 대학 강연은 상지대학의 일이 아니고 내 개인의 일이다 싶어서 자동차 기름값을 강연료 중에서 지불했다. 그랬더니 경리과에서 총장이 움직이는 것은 곧 대학이 움직이는 것과 같으니 자동차 기름값을 총장 개인이 부담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기에 그 후에는 기름값 부담을 하지 않기로 했다. 구차한 이야기지만 이런 일을 밝히게 되는 세정이 안타깝기도 하다. (주석 4)

그가 총장으로 재임하는 4년 동안 상지대학은 몰라보게 변했다. 각종 비리가 사라지고 활기가 넘쳤다. 비리 대학이라는 오명과 멍에 대신에 '민주 대학'이라는 이름이 붙고, 그에게는 '민주 대학 총장'이라는 명예가 따랐다.

주석
1> <역사가의 시간>, 413쪽.
2> 앞의 책, 414쪽.
3> 앞의 책, 417쪽.
4> 앞의 책, 423~42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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