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삼성의 달라진 위상

김민영,산업1부 2024. 5. 6.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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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영 산업1부 기자

기업문화 선도해 왔는데
임원들의 ‘주 6일 근무제’
시대 흐름에 맞는 것일까

20여년 전 초등학생 시절 담임 선생님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을 무척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수업 시간에 자주 이 선대회장 얘길 꺼내곤 했다. 물론 존경심 가득한 표정과 말투였다.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오전 7시에 출근하고, 오후 4시에 퇴근하는 삼성의 ‘7·4 출퇴근 제도’를 찬양했었다는 점이다.

당시에도 1등 기업이었던 삼성의 저력은 모든 임직원이 새벽같이 나와 일과를 시작하고 열심히 일하는 데서 비롯됐다는 취지였다. 매일같이 지각을 밥 먹듯 하던 제자들에게 삼성을 예로 들며 근면 성실을 강조했던 것이다.

삼성이 1993년 신경영 선언 이후 도입한 7·4제는 대부분 기업이 오전 8시 또는 9시에 출근하던 당시로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삼성은 다른 기업보다 먼저 출근해 회의하고 일하는 업무 집중 문화를 도입하려고 했고 이 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그 결과 삼성은 한국을 넘어 세계를 호령하는 글로벌 1등 기업이 됐다. 임직원들의 의식 전환을 위한 처방이 맞아떨어졌던 셈이다. 7·4제는 2002년 역사적 소명을 다하고 폐지됐다. 유연근무니 탄력근무니 해도 7·4제는 여전히 ‘일 잘하는 삼성’의 상징처럼 회자되고 있다.

군 시절엔 상관으로부터 삼성 특유의 조직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말을 귀에 인이 박이게 들었다. 일사불란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군대에서조차 삼성의 문화를 본받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자주 들었던 것은 삼성전자가 2012년 도입한 ‘119 캠페인’이었다. 119 캠페인은 ‘한 가지 술로 1차에서 끝내고 오후 9시 이전에 귀가한다’는 뜻이다. 늦게까지 놀고 마시는 술자리 문화를 타파하자는 삼성전자의 절주 캠페인이었다. 아무리 회식이 업무의 연장이라지만, 덮어놓고 술 마시는 걸 자제하자는 삼성의 제안은 전국적으로 유행했고 군대까지 퍼졌었다. 물론 밤 9시 전에 회식을 끝내는 건 코로나19가 가져다준 선물이지만 돌아보면 새삼 삼성의 위상이 참 대단했다고 느껴진다.

어쩌면 삼성은 정부가 해야 할 일, 또 정부가 하지 못하는 일까지 해내면서 한국 기업문화의 표본을 만들어 왔던 것이 아닐까 싶다. 삼성이 하면 혁신이자 파격이었고 다른 조직도 따라 해 곧 대세가 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러나 요즘 삼성의 위상이 조금은 달라진 듯하다. “삼성을 본받자” “삼성을 배우자”는 말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삼성이 실시한 정책에 물음표를 던지는 일이 생겨나고 있다. 삼성그룹이 지난달부터 실시한 전 계열사 임원의 주6일 근무도 그중 하나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파격적인 조처라지만 언제 어디서든 근무할 수 있는 원격근무 시대에 주말 사무실 출근은 생경하게 다가온다. “파격의 삼성” “역시 삼성” 등의 소리를 듣던 예전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재계 관계자들조차 주말 출근이 얼마나 구태의연한 것인지 되묻는다. 4대 그룹 관계자는 “주4일 논하는 시기에 삼성의 결정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삼성의 강제 주말 출근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며 “특정인의 즉흥적인 지시였다는 소문이 돈다”고 귀띔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단순히 반도체 부진으로 인해 실적이 꺾여서일까. 아닌 것 같다. 30년을 이어온 1등 DNA가 일시적인 실적 부진으로 한순간에 어디로 가겠는가. 기업문화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해서일까. 반만 맞는 것 같다. 확실한 건 주말 출근은 새로운 경영 방침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구경영에 가깝다. 신경영 선언 이후 벌써 30년이 훌쩍 지났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모든 것이 변했다. 지금은 인공지능(AI) 시대다. 이제 지난 30년은 잊어버리고 새로운 30년을 내다볼 선언을 해야 할 때다. 모든 기업의 본보기가 되고 정부 기관도 삼성을 배우고자 나섰던 삼성의 모습을 하루빨리 되찾길 바란다. 초격차를 외치던 삼성이 그립다.

김민영 산업1부 기자 m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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