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플레이션’ 시대…1000원 빵집이 떴다 [TREND]
4월 23일 오전 11시, 2호선 이대역 개찰구를 나오니 빨간 현수막 간판의 ‘1000원 빵집’이 눈에 띈다. ‘1000원’ 가격에 혹해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은 단팥빵부터 꿀호떡, 카스텔라 등 50여가지의 빵을 취향껏 집어댄다. 20대 대학생부터 70대 노인까지 손님층도 다양하다. 지난해 12월부터 이곳 빵집을 운영한 최은서 씨는 “빵집은 매일 아침 7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열고, 하루 평균 2000개가 팔린다. 대학교 근처라 손님의 70%는 인근 대학생이다. 외국인 손님도 꽤 온다”며 “출퇴근 시간과 출출한 시간대에 가장 많이 팔리는데, 장사가 잘돼 5월에 목동시장 앞에 2호점을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만난 인근 대학생 이미주 씨는 “최근 시험 기간이라 간단히 한 끼 때우기 위해 자주 찾는다. 대형 브랜드에서 빵을 사 먹으려면 가격이 너무 비싸다. 유튜브나 SNS를 통해 접한 1000원 빵집이 근처에 있어 반갑고 고맙다”며 웃었다.
강남역 신분당선을 타러 가는 길목 지하상가의 1000원 빵집 ‘하이서리’. 빵뿐 아니라 떡과 김밥, 간편식품 등 다른 제품도 저렴하게 팔고 있다. 다른 역사 매장보다 규모도 훨씬 크다. 유동인구가 많은 만큼 매장은 교복을 입은 청소년부터 대학생, 퇴근한 직장인 등 여러 손님으로 붐볐다. 40대 직장인 이현수 씨(가명)는 “강남에서는 무얼 사든 비싼데 이곳은 저렴해서 호기심이 생겼다. 1000원짜리 빵이어도 유통기한도 길고 먹을 만하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듣고 많이 샀다”고 들려줬다.
2000년대 중순 인기를 끌었다가 자취를 감추는 듯했던 지하철 역사 내 ‘1000원 빵집’이 불황을 타고 우후죽순 늘고 있다. 이대, 신촌 등 대학가는 물론 강남과 종로 등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철 역사라면 1000원 빵집 하나쯤 발견하는 것은 그닥 어렵지 않다. 외식 물가가 급등한 상황에서 단돈 1000원으로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다는 장점에 수요가 늘고 있다는 전언이다.
제조사 “생산량 2배 늘려”
시간을 돌려 2000년대 중반. 당시 지하철 역사 또는 인근에 있는 빵집들은 ‘빵 3개에 1000원’을 내세우며 인기를 끈 바 있다. 그러나 국내 베이커리 시장이 성장하고 식습관 변화에 양산형 빵 인기는 빠르게 식어갔다. 직접 구워낸 소금빵, 베이글 등 프리미엄 베이커리가 인기를 끈 것도 ‘1000원 빵’이 사라지는 데 한몫했다.
그런데 최근 느닷없이 1000원 빵집이 우후죽순 생기는 이유는 뭘까. 그 배경으로는 ‘빵플레이션’이 꼽힌다. 빵과 인플레이션을 합친 단어다. 빵의 주재료인 원유와 설탕·소금, 밀가루 가격이 우크라이나 전쟁 영향으로 2022년부터 급등했다. 지난 1년 동안 빵 가격은 전년 대비 9.5% 올랐다. 소비자물가 상승률 평균치(3.6%)보다 3배 가까이 높은 수준. 당연히 소비자들이 느끼는 가격 부담은 더욱 컸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물가감시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기준 베이커리 프랜차이즈 업계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는 크림빵과 슈크림빵 가격을 전년 대비 각각 21.4%, 11.8% 올렸다. 임차료와 인건비가 높아 원재룟값이 떨어져도 빵값을 내리기 어렵다는 게 업계 입장이다. 빵플레이션이 화제가 되자 ‘가성비 빵’을 찾는 소비자가 늘어났고, 이런 심리를 꿰뚫어 등장한 1000원 빵집이 자연스레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무엇보다 맛이 무난하다는 게 제1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1000원 빵 구매자들은 “베이커리 프랜차이즈 빵 맛과 큰 차이는 안 난다”고 입을 모았다.
1000원 빵 인기가 커지면서 빵 가게에 납품하는 공장 빵 제조사 역시 빵 공급량을 늘리고 있는 모양새다. 약 20가지 종류 1000원 빵을 생산하는 한 유통업체 관계자는 “지난해 초부터 1000원 빵을 찾는 이가 많아지면서 납품 업체가 수도권을 중심으로 많이 늘었다”며 “초창기에는 하루 1만개 정도를 생산했는데 요즘 하루 생산량은 2만개 정도로 2배 가까이 늘렸다”고 귀띔한다.
‘단기 임대·박리다매’가 핵심
1000원 빵 업체 입장에서는 단돈 1000원에 빵을 판매하면 남는 게 있을까.
베이커리 전문점의 경우 보증금과 임대료를 포함한 초기 창업비용이 수억원대다. 반면, 1000원 빵 가게는 임시로 매장을 임대하는 ‘단기 임대’ 방식을 통해 비싼 임대료를 아낀다. 단기 임대는 보증금 없이 수백만원대 월세만 내면 된다. 월세가 시가보다 30% 이상 비싸기는 하지만 정해진 계약 기간이 없어 자유롭게 철수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한 1000원 빵집 주인은 “한 달 단위로 원하는 만큼 매장을 운영할 수 있는 점이 가장 좋다. 장사는 부침이 있을 수 있는데 전세 단위로 계약하는 건 위험 부담이 크다”고 밝혔다. 총 창업비용 1500만원 정도로 부담 없이 1000원 빵집을 열었다는 스토리도 들려온다.
물론 위치나 평수, 유동인구에 따라 월세는 다르게 책정된다. 이대역 1000원 빵집의 월세는 보증금 없이 400만원. 서울 역사 매장 중 저렴한 편에 속한다. 다른 2호선 역사 내 매장은 월세가 1000만원인 곳도 있다.
비교적 간단한 유통 구조로 비용을 아낀 것도 한몫했다. 일반 가맹점이 원재료 수입사와 도매상, 소매 납품 업체 등으로 이어지는 유통 단계마다 마진이 붙는 것과 달리, 1000원 빵집은 공장에서 대량의 빵을 도매로 들여오는 비용만 내면 된다. 다만 빵 판매가가 매우 저렴한 만큼, 빵집 주인들은 ‘박리다매’를 해야 이윤을 남길 수 있다. 공장에서 들여오는 빵 원가를 비교했을 때 마진은 빵 1개당 200~300원밖에 되지 않는다. 심지어 카드로 결제하는 경우 수수료와 세금도 추가로 빠져나가 이윤은 더 줄어든다.
이에 최근 1000원 빵집이었다가 1200원 빵집이 된 곳도 나타났다. 납품처가 단가를 100원가량 올려서다. 한 1000원 빵집 점주는 “빵 입고 단가가 높아지면 1000원에 팔고 싶어도 남는 게 없다”며 “최대한 1000원을 유지하고 싶은데, 많이 팔아도 유지가 안 되면 1200원으로 올릴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전형적인 불황형 소비”
전문가들은 최근 1000원 빵집 인기는 ‘불황형 소비의 전형적인 예시’라고 진단한다. 경기 침체기 소비자들의 ‘알뜰 소비’ 현상이 더욱 고착화될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최철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고물가에 소비자들이 빵 가격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며 “소비자들은 소비 지출 여력이 줄었을 때 1000원 빵과 같은 ‘가성비’ 제품을 찾게 된다”고 진단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3년째 고물가 상황에 시달리면서 절약하고 아끼려는 소비 성향을 생활화하려는 경향이 드러난 셈”이라며 “앞으로 금리와 물가가 내릴 가능성이 작을 것으로 전망돼 이런 ‘알뜰 소비’ 현상은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7호 (2024.05.01~2024.05.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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