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도 성공해냈는데... 맥아더는 하필 여기서 실패했다 [윤태옥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윤태옥(답사 여행객)]
▲ 38선 |
ⓒ 윤태옥 |
38선이 지나는 도로에는 38선 표지가 적지 않게 설치돼 있다. 표지로서 가장 서쪽은 경기 연천의 백학면 통구리 453, 청정로에 있다. 가장 동쪽은 강원 양양의 기사문 해변 근처, 7번 국도 변의 38선휴게소에 있다. 바로 이 38선에 유엔군과 국군이 도달했다.
북한이 남침 전면전을 개시한 38선은 그대로지만 이제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해 북진할 것인가. 38선은 또다시 전세계의 주목을 받게 됐다.
국군이 38선을 돌파하기 한 달 전인 9월 1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한국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통일할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 우리는 유엔의 지도 지침 아래 다른 나라와 더불어 그들이 권리를 향유하도록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을 남침 이전으로 복귀시킨다는 기존의 입장을 버리고, 이미 벌어진 전쟁을 계속해서 북한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남한에 흡수통일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 발언은 낙동강 전선에서 힘의 균형추가 유엔군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을 확인하고 인천상륙작전을 포함한 반격의 전망이 밝아지는 단계에서 나왔다. 참전했으나 아직 수세일 때에는 38선 회복이 목표였으나, 판세를 뒤집을 만한 변곡점에 다다랐다고 판단되자 입장을 바꾼 것이다.
입장 바꾸기는 사회주의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이 38선을 침범할 때에는 뒷짐 지고 있더니 미국이 반격해 북진하자 새삼스레 38선 북진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제사회란, 정의니 뭐니 하는 가치는 자신의 이익을 감싸는 포장지이고, 실제로는 철저하게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갈등과 이기의 바다일 뿐이다.
자본주의 진영 역시 자국의 이해에 따라 찬반이 있었고, 미국 안에서도 찬반이 있었다. 미국 국무부는 중국과 소련이 개입 여부가 확인될 때까지는 북진에 유보적이었다. 국방부는 맥아더와 함께 강경 북진론이었다. 북한 인민군을 아예 분쇄해서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미국의 최종 입장은 소위 '9.27훈령'으로 정리됐다.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허용하고, 인민군을 격멸하되 중국과 소련과의 충돌은 피한다는 것이다.
미극동군 사령관이자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는 본국의 훈령에 의거해 북진을 준비했다. 10월 1일에는 북한에게 항복하라는 방송을 했다. 미국이 9.27훈령을 발동하자 10월 7일 유엔은 '통일한국'을 결의했다. 트루먼의 말과는 반대였다. 미국이 유엔의 지침을 따른 것이 아니고, 미국의 훈령에 따라 유엔의 지침이 정리된 것이다.
중국은 국군의 북진 하루 전에 외교부장 저우언라이가 북한이 침략을 당하면 방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10월 3일에는 주중 인도대사에게 한국군이 아닌 군대가 38선을 넘으면 중국도 군대를 파견할 것이라고 미국에게 직설적으로 경고했다.
▲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북진 진전도 |
ⓒ 봉주영 |
한편 이승만은 유엔군의 38선 돌파 여부에 대해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해 초조했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대단히 강경한 북진통일론자였다. 서울에서 환도식이 열린 9월 29일 미8군 사령관 워커는 기자들에게 '진격은 38선까지'라고 말했다. 이날 맥아더가 이승만에게 자신은 북진할 권한이 없다고 하자 이승만은 독자적으로 북진하겠다고 언명했다. 이승만은 이날 오후 대구 육군본부로 가서 한국군 장성들을 모아놓고 직접 북진 명령서를 하달했다.
이승만의 명령을 받은 참모총장 정일권은 미8군 사령관 워커에게 38선 돌파에 적절한 구실을 내밀었다. 국군 3사단이 38선 이북의 인민군 고지로부터 피해를 당하고 있으니 이를 해소하기 위해 고지를 공격하겠다고 건의한 것이다. 정일권은 전선의 군인답게 정치적 이슈를 전술적 이유로 치환시켰고 워커는 전술적인 이유로 흔쾌히 승낙했다. 정일권은 9월 30일 강릉으로 가서 1군단에게 38선 돌파를 지시했다. 1군단 작전명령103호, 3사단 작전명령 44호가 그것이다.
인민군이 패퇴하면서 38선 이북으로 돌아간 병력은 2만 5천 내지 3만 정도로 추정됐다. 낙동강 전선에 집중됐던 7만 5천의 반도 되지 않는 숫자였다. 전선의 조직은 크게 약화됐고, 보급은 두절된 상태에서 인민군 병사들은 거의 전의를 상실했다.
드디어 38선을 돌파해 북진이 시작됐다. 남침이 전면전이었던 만큼 북진이란 반작용은 더더욱 강력했다. 내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서 배웠던 6.25의 노래 그대로가 아니었을까. '조국을 짓밟은 오랑캐 원수들에게 피의 원한을 푼다'는 기세였을 것이다.
38선 서부에서는 북한의 수도인 평양이, 동부에서는 북한의 산업과 물류의 중심지인 원산이 가장 큰 목표였다. 이때 유엔군의 북진 한계선은 정주-영원-함흥(소위 맥아더선)이었다.
이승만의 명령을 받은 동해안의 국군 1군단 3사단이 38선을 가장 먼저 돌파했다. 양양의 7번 도로를 따라 진격했다. 경미한 저항을 제압하며 양양에 돌입한 것이 10월 1일이다. 5일 고성에서 격전이 있었다. 통천에서도 몇 차례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는 패천 쌍음을 거쳐 원산을 공격할 지점에 이르렀다. 하루 평균 24킬로미터의 속도로 북진한 것이다.
1군단의 수도사단은 1개 연대는 양양에서 인제-양구-말휘리-화천-도납리-황룡산-안변으로, 2개 연대는 간성-고성-통천까지 동해안으로 북진하다가 내륙으로 방향을 틀어 화천-회양-신고산-안변으로 진격했다. 수도사단은 산악지대로 들어간 인민군을 소탕하며 북진했다. 신고산에서는 전차 6대를 포함해 상당량의 인민군 보급품을 탈취하며 큰 전과를 올렸다. 안변에서 3개 연대가 다시 집결한 수도사단은 곧바로 원산 공격을 준비했다.
10월 10일 3사단과 수도사단이 동시에 원산을 공격했다. 두 개 사단 사이에 북진경쟁이 치열해 지경선을 침범하는 일도 있었다. 공격을 시작하고 혼전 끝에 원산 중심부를 점령했다. 12일에는 원산 비행장도 장악해 유엔군 수송기가 착륙할 수 있었다.
원산을 함락시킨 뉴스에 많은 사람들이 고무됐다. 이승만은 원산을 몸소 방문해 38선을 제일 먼저 돌파한 공을 치하하고 1군단 전장병을 일계급씩 특진시켰다. 한국전쟁은 이승만의 주장대로 북한군을 격멸하고 북진통일을 곧 이룰 것 같은 분위기였다. 원산의 성공이었다.
중부지역은 국군 2군단의 6, 7, 8사단이 포진하고 있었다. 중부의 38선 중심은 춘천이었다. 6월 25일 새벽 모진교 남쪽 고지가 인민군의 포격에 파괴되면서 기습공격을 당했던 국군 6사단이 10월 5일 바로 그 모진교를 건너 38선을 돌파하며 북진을 시작했다.
6사단은 인민군의 저항을 격파하고 화천까지 거침없이 진격했다. 화천-김화 다음에 금성-신안-회양-신고산까지 진출한 다음 평양 쪽으로 방향을 틀어 양덕을 거쳐 10월 19일 성천까지 진격했다. 성천은 평양의 북동쪽 뒷덜미였다. 북한의 수도를 바로 타격할 수 있는 곳이었다.
8사단은 한탄철교 남단의 초성리에서 38선을 돌파해 연천-철원-평강 다음에 이천-곡산-수안-율리를 거쳐 10월 18일 평양의 동쪽 관자놀이를 직접 겨눌 수 있는 삼등까지 진출했다. 예비대인 7사단은 포천 양문리를 출발해 김화를 거쳐 8사단의 후미를 따라 북진했다.
서부지역은 개성-사리원-평양으로 이어지는 북진의 주전장이었다. 미8군은 개성 금천 사리원을 돌파해 평양을 압박해 들어가고 있었다. 개성-평양 축선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다소 지체되기도 했지만 대세는 유엔군이었다.
▲ 미 해병 제1사단의 원산 상륙 |
ⓒ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
그러나 한쪽에서는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원상상륙작전이었다. 맥아더는 서울을 탈환하자 바로 원산상륙작전을 지시했다. 미8군이 개성-평양으로 진격하는 동안 미10군단(7사단과 해병1사단)을 원산에 상륙시켜 원산-평양으로 치고 들어가 전체 인민군의 퇴로를 차단하겠다는 구상이었다. 해군 지휘관들은 육상보다 해상이동이 시간이 더 걸린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자신의 판단을 굽히지 않고 원산상륙작전을 밀어붙였다.
해군의 우려가 당장 현실로 나타났다. 미해병 1사단은 인천에서 보급품과 장비를 탑재하는 데 8일이나 걸렸다. 작전지역을 인계하고도 보름이 지난 10월 16일 인천에서 출항할 수 있었다. 3일간 항해해 19일 원산 앞 바다인 영흥만에 도착했으나 상륙할 수 없었다. 인민군이 영흥만에 설치한 기뢰를 제거하는 데 당초 예상했던 5일이 아니라 15일이나 걸린 것이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기뢰폭발로 인해 소해정이 네 척이나 침몰했다.
해상에서 장시간 대기하자 LST나 수송함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평소처럼 운항했으면 태평양을 횡단했을 기간이었다. 그런 예상을 못했으니 그에 적합한 준비도 없었다. 특히 강력한 예방조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내의 위생상태가 악화됐다. 선내 장병들에게 위장염과 이질이 만연했다. 한 수송함에서는 750여 명이 유행성 전염병에 걸렸다. 다른 함정에서는 천연두가 발생해 상륙군뿐 아니라 승조원까지 백신을 접종해야 했다.
이런 곡절 끝에 미해병 1사단은 10월 25일 상륙을 시작했다. 상륙을 완료하는 데 일주일 걸렸다. 인천과 같은 돌격상륙이 아니었다. 국군이 진작에 점령한 원산 해안에 행정상륙을 한 것이다.
포격도 없는 행정상륙이었으나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주정로가 해안에서 46미터 정도 떨어진 모래톱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무거운 주정들은 모래톱에 좌초되곤 했다. 좌초하면 육상의 장갑도저를 동원해서 해안으로 견인하거나 아니면 물속에서 램프를 열고 바지선의 크레인을 접근시켜 화물을 양륙해야 했다.
모래톱을 통과해도 원산 앞바다의 경사가 낮아 화물을 적재한 상륙주정들이 해안에 직접 도달할 수 없었다. 해안부대들은 바다로 9미터나 들어가는 램프를 설치했다. 모래를 채운 마대로 만든 임시잔교들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인력과 중장비를 추가로 동원해야 했다.
병력과 보급품이 해안에 도착해도 모래언덕을 넘어 내륙으로 수송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트럭과 트레일러가 수렁에 빠져서 견인하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실어 온 보급품도 종별 구분 없이 혼재된 것들이 많아 이것을 다시 분리하고 분배하기 위해 매일 1500~2000명의 노무자를 동원해야 했다.
미7사단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동하는 열차부터 문제였다. 미공군이 인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공습으로 파괴했던 철도를 이제는 서둘러 복구해야 했다. 이렇게 부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부산항에서는 미해병 1사단과 마찬가지였다. 10월 16, 17일 부산항에서 승선했으나 영흥만의 기뢰에 막혀 부산 앞바다에서 열흘이나 대기하다가 27일에야 북상 항해를 시작했다.
서부지역의 미8군과 동해안에 상륙한 미10군단이 연결해 북한 인민군을 차단하고 격멸한다는 당초의 계획은 상륙도 하기 전에 무효가 됐다. 원산상륙작전이 출발선에서 지지부진하고 있을 때 동해안의 국군 1군단의 3사단과 수도사단이 이미 원산을 점령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중부지역의 국군 2군단은 원산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평양을 포위하며 뒷덜미를 압박했다. 미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할 때 평양에서는 전투는커녕 환영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커다란 틈
▲ 강원 양양 38선 기문항의 아침 |
ⓒ 윤태옥 |
원산의 실패는 서해와 서부전선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두 상륙사단의 병력과 물자 수송을 위해 일체의 수송선을 원산으로 총동원하자 서해 해상수송이 정지되다시피 했다. 서부지역의 미8군 보급체계가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평양을 점령하고도 평양의 외항인 진남포를 사용할 수 없었다. 미국과 한국의 소해정이 모두 원산으로 출동한 탓에 진남포의 기뢰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양에 보내는 보급품은 인천항에서부터 육상으로 수송해야 했다. 특히 탄약보급이 늦어지자 미8군의 화력도 점점 저하됐다.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의 보급이 한계를 드러내자 유엔군이 소모전을 전개해 인민군을 압박했듯이, 이번에는 중국군이 산악지대에 은거한 채 유엔군을 상대로 소모전을 펼칠 수 있게 됐다.
또 하나의 작전 실패는 유엔군의 작전권을 분리한 것이다. 맥아더는 미8군 사령관의 작전권에서 미10군단을 자신의 직할로 빼냈다. 이로써 동부와 서부의 협동작전은 동경의 유엔군 사령부를 경유하는 느슨한 관계로 벌어졌다. 이 상태에서 맥아더는 두 부대에게 각각 한중 국경으로 최대 속도로 진격하도록 했다.
서부의 미8군과 동부의 미10군단 사이에는 장진호를 비롯한 커다란 틈이 생겼다. 중국군이 그 틈새의 산악지대를 파고들어 유엔군 후방까지 침투할 수 있었다. 지상전으로 원산을 점령해 성공을 기록한 국군과 미군의 원산상륙 실패는 선명하게 대비됐다.
아무튼 원산에 상륙한 미해병 1사단은 10월 29일 임무를 지상전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11월 2일 수동에 도착해 장진호 방면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7일까지 닷새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겨우 5킬로미터만 진격했을 뿐이었다.
이 가운데 124사단 소속 중국군 포로 3명을 붙잡았다. 자신들은 10일 전에 이 지역에 투입됐고 장진호 부근에 나머지 2개 연대가 잠복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사단급 부대가 잠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즉시 맥아더에게 보고됐다.
11월 9일 황초령을 넘어 11월 10일 고토리를 점령하고 하갈우리로 전진했다, 적군은 장진호 부근으로 퇴각했다. 적군의 퇴각으로 인해 미해병 1사단장은 11월 13일 순조롭게 북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중국군이 파놓은 함정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는 현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24일 장진호 서안의 유담리까지 진격하고 중국군 2명을 생포했다. 이들은 중국군 124사단이 아닌 89사단 소속이었다. 10일 전에 압록강을 건너왔다는 것이다. 앞의 포로와는 다른 사단이었다. 그러나 미10군단은 적군의 증원은 없었을 것이라고 어처구니 없는 오판을 했다.
장진호와는 달리 동북 지역에서는 순조롭게 북진을 했다. 미7사단은 풍산에서 격전을 치루고 식우리-송우리-장평리-갑산 판장리까지 진출했다. 11월 21일 오전 10시 압록강에 도달했다. 국군 6사단에 이어 두 번째로 압록강에 진출했다.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험준한 산악지대를 가로지르며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그야말로 값진 진격이었다.
두만강으로도 진격했다. 미10군단이 원산과 이원에 상륙하자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은 작전구역을 이들에게 넘겼다. 국군 2개 사단은 동해안 축선을 따라 빠른 속도로 북진했다. 수도사단은 10월 30일 성진에 집결했다. 11월 5일 길주를 점령했고, 인민군의 강력한 저항을 돌파해 11월 25일 청진에 도달했다.
▲ 38선휴게소 |
ⓒ 윤태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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