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암 극복' 윤도현 "신해철, 가장 미친 사람" 애틋한 사연
희귀암 극복한 가수 윤도현
그런 목소리가 있다. 거침없이 포효하는 사자처럼, 울다가 지쳐버린 외로운 남자처럼, 등 뒤에서 조용히 위로해 주는 친구처럼 들리는 목소리. 이들의 공통점은 기교 없이 묵묵하고 담백하다는 것이다. 가수 윤도현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느끼는 바다.
20대는 폭주기관차, 지금은 KTX 목소리
지난해 8월, 윤도현은 희귀성 암인 위말트 림프종 진단을 받고 3년의 투병 끝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깜짝 고백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가 무대로 돌아왔다. YB는 현재 3월 대구를 시작으로 수원·안산·창원·부산·인천 등 전국을 누비며 ‘2024 YB TOUR LIGHT; INFINITY’ 콘서트를 진행 중이다. 종착지는 6월 8·9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는 서울 공연이다. 오직 음악과 조명만으로 정면승부를 하겠다는 포부로 시작된 YB만의 공연 브랜드 ‘LIGHT’에 무한함을 뜻하는 ‘INFINITY’를 덧붙였다. YB만이 할 수 있는 한계 없는 음악적 스펙트럼을 강조한 의미다.
방송 출연 외에는 내내 미디어 인터뷰를 거절했던 그와 지난달 26일 어렵게 만나 근황에 대해 들었다. 다행히도 그는 건강해 보였다. 콘서트 무대에서도 파워풀한 가창력은 여전하다. “아무래도 건강에 더 신경 쓰니까요. 투어 일정이 주말이라 금요일에 지방에 가면 무조건 호텔에서 8시부터 자요. 공연 끝나면 또 바로 와서 자고. 예전 같으면 자전거도 타고 등산도 했을 텐데 요즘은 공연과 건강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이번 전국 투어에선 특별하게 공감 토크 ‘YB의 DM 레터’ 이벤트를 진행한다. 윤도현의 선후배 뮤지션과 지인들, 깜짝 게스트, 그리고 미리 사연을 보낸 이들이 무대에 올라 ‘공감’과 ‘위로’를 주제로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코너다. 암 완치 소식 후 많은 암 환자와 가족들이 SNS에 ‘힘을 얻었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윤도현은 사연마다 모두 댓글을 달았다. 누군가 내 이야기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는 걸 알기 때문이다. 부산 공연에선 11살짜리 초등학생이 무대에 올랐다. 라디오 프로그램 ‘4시엔 윤도현입니다’에 10년 간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사연을 보냈던 학생이다. 윤도현이 공연에 초대했고, 사연을 들은 관객들은 ‘흰수염고래’를 열창하며 소년을 응원했다.
공연이 아닐 때는 새 음반 준비에 몰두한다. 6월쯤 첫 선을 보일 새 음반 장르는 메탈이다. “고등학교 때 ‘단두대’라는 메탈 밴드를 했는데, 80년대 말 얼터너티브 장르가 생기면서 메탈이 촌스럽게 느껴졌어요. 이후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아플 때 우연히 유튜브에서 스타일리시하고 멋진 메탈 음악을 접하고 완전 빠져들었죠. 마치 우주여행을 하는 것처럼 자유로웠어요. 그래, 이거다!”
‘필’은 받았지만 록 밴드 YB에게 메탈은 엄청난 도전이라 음반 작업이 쉽진 않다. “YB 스타일도 아니고, 멤버들 나이가 다 50이 넘어서 체력도 달려요.(웃음) 우리가 알던 클래식 메탈이 아니라 최신 메탈이라 더 어렵고. 에릭 클립톤이 메탈에 도전하는 격이랄까.(웃음) 그래도 모두 의지를 불태우며 맹연습 중이죠. 안 될 것 같은 걸 해내는 게 인생의 큰 재미니까요.”
보컬리스트인 그에게도 새로운 도전이다. YB의 색깔과 새로운 메탈의 접점을 찾으려면 멜로딕한 목소리와 ‘그로울링(낮은 톤으로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는 창법)’이 공존해야 한다. “한 곡에서 보컬리스트의 자아가 극과 극으로 바뀌는 거죠. 그로울링은 괴물 같은 소리라 들으시면 놀라실 거예요.”
올해 나이 52세. 중년이 된 그는 어떤 고민을 할까. 옆에서 데뷔 때부터 29년을 지켜본 기획사 대표는 “형은 만년 뽀로로”라고 했지만 윤도현의 대답은 딱 대한민국 중년 남자다웠다. “멤버들끼리 만나면 애들 얘기, 교육 얘기, 돈 들어가는 얘기, 건강 얘기.(웃음) 록커도 아빠고, 남편이니까요.”
아빠 윤도현은 요즘 속으로 안절부절 못한다. 스무 살 딸내미가 곧 미국 유학을 간다. 딸이 커가는 세상은 남성 위주의 세상도, 여성이라고 무시당하는 세상도 아니길 바라며 부부의 성을 나란히 붙여 지은 이름은 ‘윤이 정’. 한자로는 ‘정(情)’. 당시 인기였던 초코파이 CF를 보고 지었다. “다른 광고들에 비해 가장 정서적으로 안정을 주는 광고였죠. 그 CF만 나오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좋았어요. 우리 애도 정을 나누는 사람이길 바란 건데, 이름 따라 간다고 진짜 정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에요.” 어차피 자주 뉴욕을 오갈 거라면 공연을 해도 좋겠다 했더니 “YB의 미국 시장 진출이 시급하다”며 활짝 웃었다.
신해철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미친 사람
추억을 찾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나이. 그는 얼마 전 ‘학전 어게인’ 공연을 하며 참 많이 울었다고 한다. “학전은 어머니 뱃속 같은 공간이고, 김민기 선생님은 아버지 같은 존재시죠. 김민기 선생님은 아프시고, 학전은 없어지고. 리허설 후 감정이 북받치더라고요.” 데뷔도 전에 윤도현을 알아본 김광석이 자신의 공연에 게스트로 그를 세웠던 공간 또한 학전이다.
어제 10년 전 세상을 뜬 신해철이 AI목소리 모델 ‘AI 신(新)해철’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신해철의 생전 육성자료들로 음성 인공지능 모델을 학습시켰다고 한다. 각별했던 신해철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들려준 일화는 웃기면서도 애틋하다. “해철이 형은 애티튜드나 음악에 대한 열정이나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미친 사람이었어요. 그런 캐릭터의 사람은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을 만큼. 개인적으로는 귀여운 형이었지만요. 술 마시자는 청을 귀찮아서 몇 번 피했더니 집으로 불러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주더라고요. 형이 살이 좀 찐 후라 앞치마를 두른 뒷모습이 장모님 같아서 한참 웃었죠.(웃음) 그날 저녁 형 작업실에서 컴퓨터에 담긴 미발표 곡을 밤새 들었어요. 미발표 곡이 무려 200곡이나 된다니 이 형 정말 미쳤구나, 대단하다 생각하면서도 새벽 무렵에는 너무 졸려서 형의 질문들에 대충 대답했어요. 그때 내가 더 잘 할 걸…아쉬워요.”
김광석·신해철 모두 아티스트로서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선배들이다. 요즘 윤도현은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 중이다. KBS 다큐멘터리 ‘지구 위 블랙박스’ 촬영 때는 바닷물이 점차 차 오르는 수조 안에서 노래하는 퍼포먼스로 해수면 상승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메탈리카 30주년 앨범 ‘The blacklist’에 참여했던 관련 수익은 모두 환경단체 그린피스에 기부했다. 라디오에선 ‘가치합시다’ 코너를 통해 청취자들과 함께 텀블러 쓰기, 세제 물에 풀어 쓰기, 계단 오르기, 일회용품 사용 자제 등 일상 캠페인도 벌인다. “무분별한 난개발들로 자연이 무너지고 있으니 안타깝죠. 이제 단순히 보호·보존 차원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위해 지구인 전체가 노력하고 연구할 때에요.”
올해는 YB가 결성된 지 29년이 되는 해다. 외국의 60~70대 밴드들이 노익장을 과시하며 공연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밴드가 있기를 바라고, 그 기대를 YB에 걸어보는 이들이 많다. “데뷔 후 4년 간 앨범을 계속 발표했지만 히트곡이 없었어요. 그래도 계속 했죠. 사람들이 한 곡도 모르는 앨범도 있어요. 그런데도 계속 했어요.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쏟아 붓는 음악, 이런 음악이 우리를 오래 지탱해 준 코어 근육 같은 존재죠. 꾸준히 하는 것, 그 자체가 우리가 오래 갈 수 있는 에너지인 것 같아요.”
인터뷰 내내 그 특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질문이 생겼다. 29년 동안 늙지 않는 목소리의 비결이 뭘까. “변했어요.(웃음) 20대 때는 폭주기관차 같았는데 지금은 KTX에요. 20대에는 투박하지만 불을 활활 태워가며 막 달렸다면, 지금은 뭔가 힘이 달리니까 노련미와 기술의 힘으로 보완하는 거죠.” 세월이 다듬은 윤도현의 진짜 목소리를 확인하려면 공연장에 가야겠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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