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고도를 기다리며'…연극계 대부 임영웅 산울림 대표 별세
소극장 산울림을 현대연극 산실로 키워낸 연극계 대부 임영웅 대표가 4일 별세했다. 89세.
산울림에 따르면 임 대표는 노환으로 입원 중이던 서울대병원에서 이날 새벽 3시 23분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193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55년 연극 ‘사육신’ 연출로 데뷔 이래 70년 무대 인생 외길을 걸었다. 어릴 적 할머니를 따라 극장‧영화관을 자주 다니며 연극에 재미를 붙였다. 중학 시절 국어교사 조흔파 선생이 권해 연극반에 들어간 게 운명이 됐다.
1970년 극단 산울림 창단, 1985년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에 산울림 소극장을 개관해 완성도 높은 작품을 올리며 연극적 실험을 쉬지 않았다. 최근 폐관한 김민기의 ‘학전’과 더불어 한국 소극장 양대 성지로 꼽혔다.
50년간 '고도를 기다리며' 한국 부조리극 토대
부조리극 대가 사무엘 베케트(1906~1989)의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가 한국 무대에 깊이 뿌리내린 것도 고인의 공로다. 1969년부터 50년간 1500회 이상 직접 연출을 맡아 공연하며 22만명 넘는 관객을 만났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파리 초연(1953) 후 국내 여러 극단이 시도했지만, 반향이 없었다. 69년 고인의 충실한 해석, 부인인 불문학자 오증자 서울여대 명예교수의 번역이 같은 해 베케트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맞물려 화제를 모으며, 유럽에서도 호평 받았다.
고인의 거동이 어려워져 극단 산울림이 가진 라이선스가 풀린 ‘고도를 기다리며’가 새 제작자‧연출자를 꾸려 올초까지 국립극장에서 공연할 때도, 대본은 원작자측 에이전시 요청에 따라 산울림 시절 그대로 썼다고 한다.
사재 털어 집 대신 소극장 마련, 이순재 "연극계 영웅"
고인은 삶을 연극에 다 바쳤다. 신문기자, 방송사 PD 등을 하며 배고픈 연극판을 지켰다. 국립극단 이사,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한국연극연출가협회 초대회장 등을 역임하며 연극계 대소사를 챙겼다.
산울림 소극장도 안정적인 공연장 확보를 위해 집 대신 마련한 것이다. 사재를 털어 23㎡(7평) 남짓한 무대, 100개가 안 되는 객석을 마련했다. 인건비도 안 나오는 소극장을 유지하기 위해 만년까지 극장 건물 3층에 살았다. 온가족이 극장일에 뛰어들었다. 6살 때부터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자란 장녀 임수진씨는 파리 유학 후 산울림 극장장이 됐다. 아들 임수현 서울여대 교수는 산울림 예술감독을 맡아 남매가 ‘산울림 2기’를 물려받았다.
2019년 산울림 창단 50주년 기록전에 건강악화로 휠체어를 타고 참석한 그에게 배우 이순재는 “이해랑 선생 이후 한국 연극에서 큰 금자탑을 세운 ‘영웅’”이라고 말했다.
"바보처럼, 죽기 살기로, 독립운동처럼 연극했죠"
2014년 본지 인터뷰에서 고인은 “힘들 때도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바보처럼 죽기 살기로 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처럼”이라며 “‘나만의 고도’를 꼽는다면 갈등과 투쟁이 없는, 고루 여유 있게 사는 세상이다. 숱한 좌절과 무력감 속에 다시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사회를 향한 예술의 소임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극을 100살까지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은 끝내 지켜지지 못 했다.
산울림 임수현 예술감독은 “아버님이 내년 산울림 개관 40주년을 보시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며 “한국 연극계의 큰 기둥으로 고인을 기억해달라”고 말했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7일 오전 8시, 장지는 서울추모공원이다. 유족은 불문학자 오증자씨, 딸 수진씨, 아들 수현씨가 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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