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의 열차' 타고 구소련 지역을 답사하다

김삼웅 2024. 5. 4.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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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 29] 강만길의 관심 분야와 영역은 점차 확대되었다

[김삼웅 기자]

 2003년 6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는 강만길 상지대 총장.
ⓒ 권우성
 
역사가로서 강만길의 관심 분야와 영역은 점차 확대되었다.

일본이나 미국 등지는 그도 그동안 몇 차례 다녀오기도 해서 자료가 꽤 있었다. 이와 달리 대륙에서도 특히 구소련 지역은 오랜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동토의 장막에 갇혀 있던 곳이라 역사가들에게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이곳에도 우리 동포가 약 45만 명이나 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이런저런 이유로 조국을 떠나 그곳에 정착한 1세대들도 살아 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운동에 헌신한 사람과 그 후예들도 많았다.

1937년, 소련의 스탈린 정권은 소련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연해주 지역에 사는 한인(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뒷날 밝혀진 구체적인 이유는 일본 간첩의 극동 침투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 동포들은 졸지에 반사막지대인 사지로 내몰렸다. 그 이동과 정착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연해주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60주년에 즈음하여 러시아 고려인연합회와 한국의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본부가 공동 주관한 행사가 열렸다. '회상의 열차' 프로젝트였다.

강만길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의 자격으로 성대경 교수와 함께 이 행사에 참가하기로 했다. 1997년 9월 9일, 강만길 일행은 열흘간의 긴 여행길에 올랐다. 이 '회상의 열차' 여행은 곧 역사 기행 또는 시베리아 여행기였다.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사를 발굴하고, 이주 동포들의 간고한 삶과 최악의 상황에서도 성공적인 삶을 영위해 가는 고려인들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소중하고도 영광스러운 시간이었다.

러시아 고려인연합회의 환영을 받은 첫 기착지는 블라디보스토크였다. 1937년에 스탈린 정권이 수송열차 124대에 실어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킨 한인들, 3만 6,442가구의 17만 1,781명이 살던 곳이다. 청산리대첩의 영웅 홍범도 장군도 이때 가족과 함께 강제로 이주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이어지는 일정은 '우스리스크→하바롭스크→비로비잔→모고차→치타→이르쿠츠크→끄라스노야르스크→톰스크→노보시비르스크→바르나울→룹촙스크→세미발라진스크→알마티→심켄트→타슈켄트'로 이어지는 대장정이었다. 모든 지역은 열차로 이동했다. 이 먼 거리를 현대식 열차로 이동해도 벅찬데, 당시의 열악한 조건에서 이동했다니 믿기 힘들 만큼 고난의 길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강만길은 1998년 12월에 당시의 여정을 정리해 책으로 펴냈다. <회상의 열차를 타고>(한길사)라는 여행기이다. 이는 20여 년 뒤에 '강만길 저작집 11'(2018)로 창비에서 다시 출간된다. 이 책은 '1. 고려인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2. 민족해방운동의 걸출한 지도자들, 3. 시베리아에 묻힌 유격대원들, 4. 중앙아시아에 숨쉬는 민족문화'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에서 다룬 내용 중에는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사실과 비화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실들을 소제목으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인 지도자의 숙청 : 김 미하일의 경우>, <1930년대의 시베리아에 고려인부대가 있었다>, <김 알렉산드라의 얼굴 조각과 김유천거리>, <고려인 사회의 걸출한 지도자들을 대면하다>, <'KGB 한'이 말한 사회주의 붕괴원인>, <이르쿠츠크에서 북한 노동자를 만나다>, <1920년대 연해주 지역 조선인 유격대 활동>, <고려인 오페라 가수 리나김 이야기>, <고려인 맹동욱 교수의 기구한 인생역전>, <러시아의 자랑거리 세 가지와 못 쓸 것 세 가지>, <김 블라지미르 변호사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전> 등이다.

이 책에서 <민족문화를 유지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을 보고>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호숫가에 차려진 대규모 점심 식사에는 약간의 한식과 함께 이곳 음식이 푸짐했고 코냑까지 나왔다. 박 미하일 교수, 작가 김 아나똘리 씨, 시험비행기 조종사 최 대령 등과 함께한 식탁에서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식사하는 중 호수 위에서는 입으로 연기를 뿜는 거북선 퍼레이드가 있고, 그 맞은편에서는 고려인 여성들이 우리 민요를 부르면서 거북선을 맞이했다. 거북선 꾸민 모양이 엉성했지만 이 먼 곳에서 또 모국을 떠난 지 2세대 3세대가 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거북선 퍼레이드를 본다는 것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일제강점기 시대는 그렇다 치고 해방 후에도 조국이 분단됨으로써 모국으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보호도 받지 못한 그들이면서도, 모국 문화를 유지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을 끈질기게 보이고 있는 것 같아서, 보는 마음이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주석 1) 

이 책의 <해제, 고려인 강제이주 그 통한의 길을 가다>를 쓴 허은 교수는 이 책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저자는 '회상의 열차'를 통해 한말 열강의 각축과 식민지배 그리고 민족해방을 위한 항쟁이 중첩되며 대규모로 전개된 민족이산과 강제이주의 역사를 펼친다. 근대 제국국가들에게 열차가 '팽창과 과시'를 의미했다면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열차는 '회한과 비애'의 열차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회한과 비애의 역사를 보여 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등으로 흩어졌던 고려인들이 강제이주, 스탈린의 대숙청 등을 겪으면서도 지역문화와 조화를 이루며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 주며 21세기 인류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가치, 좁게는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을 위한 가치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제시하고 있다. (주석 2)

주석
1> 강만길, <회상의 열차를 타고>, 창비, 2018, 215쪽.
2> 위의 책, 뒤표지.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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