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월클' 박찬숙, 40년 만에 카퍼레이드 합니다…바로 내일

정영재 2024. 5. 4. 13: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박찬숙 서대문구청 여자농구팀 감독


서대문구청 선수들이 훈련하는 북아현문화체육센터에서 슈팅 시범을 보여주고 있는 박찬숙 감독. 65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에너지가 넘치고 젊어 보였다. 최영재 기자
1984년 LA 올림픽에서 한국 여자농구 대표팀은 캐나다·유고·호주·중국을 연파하고 올림픽 구기 사상 첫 은메달을 따냈다. 그 중심에 센터 박찬숙이 있었다. 190㎝의 큰 키에 민첩한 동작, 정확한 슈팅은 월드 클래스였다. 은메달을 목에 건 선수들은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 퍼레이드를 펼쳤다.

40년 세월이 흐른 뒤 박찬숙은 다시 카 퍼레이드의 주인공이 됐다. 이번에는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서다. 지난해 3월 서대문구청 여자 실업농구팀을 맡은 박찬숙(65) 감독은 1년 만에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지난달 14일 김천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국실업연맹전 최종전에서 홈팀 김천시청에 47-46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고 3전 3승으로 우승했다. 현장에서 열띤 응원전을 펼친 이성헌 서대문구청장은 “우승의 기쁨을 구민들과 함께하기 위해 카 퍼레이드를 열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선수단은 어린이날인 5일 차량 세 대에 나눠 타고 서대문구 일대 주요 간선도로 15㎞를 돌 예정이다. 지난달 29일 북아현문화체육센터에서 박 감독을 만났다.

Q : 창단 1년 만에 우승을 했네요.
A : “올해 선수 보강이 좀 됐고 자신감도 있었어요. 1,2차전은 잘 했는데 마지막 김천시청과 게임은 38분을 지다가 2분 남기고 역전했어요, 워낙 드라마틱한 경기라 보는 사람은 짜릿했겠지만 저는 지옥 갔다 왔습니다.(웃음)”

Q : 어떻게 서대문구청을 맡게 됐나요.
A : “저는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했지만 여전히 지도자로서 ‘우승’에 대한 배고픔이 있었어요. 여자농구 팀이 계속 줄어 현재는 프로 6개뿐이고, 각 팀에서 15년 이상 주전으로 뛰는 선수들도 있어요. 그만큼 프로에 가는 길이 좁고, 입단해서도 조기 은퇴하는 선수들이 많죠. 이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실업팀이 자꾸 생겨야 하거든요. 마침 이성헌 구청장님이 ‘박 감독님이 맡아 주면 팀을 창단하겠다’고 해서 곧바로 오케이 했습니다. 대신, 우리 팀에서 재기해 프로로 가겠다는 선수가 있으면 무조건 보내줘야 한다고 했죠.”

Q : 선수들을 어떻게 조련했나요.
A : “한 번씩 아픔과 좌절을 겪은 아이들이라 조심스럽게 접근해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했습니다. 연습 때는 저도 선수들과 함께 뛰었고, 평소엔 ‘나를 큰엄마나 엄마라고 생각하고 뭐든지 털어놔’라고 했습니다. 경기 중 위기가 오고 선수들이 흔들릴 땐 ‘선생님을 봐. 무서울 게 뭐가 있어. 자신 있게 싸워’라고 독려했죠.”

Q : 선수단 운영은 어떻게 하나요.
A : “구청에서 마련해 준 아파트를 숙소로 씁니다. 오전에는 북아현문화체육센터에서 체력 및 슈팅 훈련, 오후에는 서대문문화체육센터에서 전술과 실전훈련을 하죠. 전용체육관이 없지만 구민들이 배려해 주셔서 체육센터를 쓰는 데 어려움이 없고, 급여도 공무원에 준하는 정도여서 안정적으로 운동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Q : 초·중·고 팀들이 베스트5 꾸리기도 어려울 정도인데요.
A : “우리 때는 실업팀이 13개여서 농구 잘하면 은행도 갈 수 있고 대기업에도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어요. 지금은 팀도 적고 게임 뛰기도 어려우니 바늘구멍으로 안 들어가려는 거죠. 프로만큼은 아니지만 급여를 받고 안정적으로 농구를 할 수 있는 실업팀이 4개인데 더 생겨야 합니다. 그래야 재능 있는 아이들이 엘리트 쪽으로 가는 길이 넓어지고 선택지가 늘어나겠죠.”

1984년 LA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박찬숙·김화순·성정아가 카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결혼과 출산 후에도 선수 생활을 이어갔던 박찬숙은 은퇴 후 여성 최초 농구 국가대표 감독, 대한체육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2009년 남편이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시련이 찾아왔다. 남매를 키우기 위해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는데, 지인의 권유로 시작한 사업이 실패했고 자신이 모든 빚을 떠안게 됐다. 법원에 파산·면책 신청을 했으나 ‘숨겨둔 소득이 있었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항고 끝에 2016년 12월 면책 선고를 받았다. 딸 서효명씨는 배우·리포터로 활동했고, 아들 서수원씨는 엄마와 같은 190㎝의 키에 이국적인 외모가 돋보이는 모델이다.

Q : 아프고 힘든 세월을 보내셨죠.
A : “평생 운동만 한 사람으로서 상상도 못한 일들을 겪었죠. 의지할 남편도 없고 아무한테나 가서 아쉬운 소리 하려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냥 숨 쉬고 싶지가 않았어요. 극단적인 생각을 하다가도 아이들을 떠올리면서 ‘아니야.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라며 정신을 차렸어요. 일단 부딪쳐 보자, 조언도 받자 하면서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니 풀려 나가더라고요. 속된 말로 잔대가리 굴렸으면 해결 안 됐을 겁니다.”

Q : 남매를 키우면서 교육 원칙이 있었나요.
A : “아빠 먼저 보낸 뒤 방송 활동도 하고 박찬숙농구클럽도 하면서 열심히 살았어요. 아이들이 ‘우리 엄마는 너무 열심히 사는 사람이야. 수퍼 우먼이야’ 라고 인정해요. 지금도 계속 움직이고 있잖아요. 시니어 모델도 해 봤어요. 그 시간들이 저한테 너무 행복하고 아이들도 그런 걸 보면서 배우는 거죠. 열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최고의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박 감독은 “물꼬를 텄으니 6월 태백시장배 대회, 10월 전국체전에서도 우승컵을 갖고 오고 싶습니다”라며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역시 우승은 좋은 거네요. 40년 만에 카 퍼레이드를 다시 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요? 대회 끝나고 ‘역시 박찬숙’이라며 격려해 주시는 팬들이 정말 많았어요. 저는 매 순간 살아있음을 느끼고 행복합니다.”

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jerry@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