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중국과 ‘사다리 걷어차기’

양민철,산업1부 2024. 5. 4. 00:3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양민철 산업1부 기자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이듬해, 영국에서 한국인 교수의 책이 한 권 나왔다.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부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 책의 요지는 단순했다. 강력한 보호무역으로 자국 산업을 키운 선진국이 정작 자신들을 뒤쫓는 후발 국가들에는 관세 인하 등 자유무역을 요구하며 이들의 사다리를 걷어찬다는 것이다. 당시 규제 완화, 시장 개방을 기치로 한 신자유주의론과 맞물리면서 중국의 WTO 가입이 또 하나의 사다리 걷어차기 사례로 남을지 주목받았다.

20여년이 흐른 지금, 결과는 중국의 완승이다. WTO 가입 이후 중국 국내총생산(GDP)은 814.6% 폭증했다. 1인당 GDP도 8717위안(약 166만원)에서 20년 새 7만2000위안(약 1335만원)으로 늘었다. 중국은 2021년 WTO 가입 20주년 행사에서 “비약적인 발전으로 중국이 세계 경제 성장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고 자평했다. 관세 인하 등 WTO가 내세운 조건들을 지키면서도 독일과 일본을 제치고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사다리를 부여잡고 올라온 중국은 이제 거꾸로 세계 각국의 발목을 잡아채고 있다. 리튬·희토류 등 광물에서부터 철강·석유화학 등 주요 산업재, 자동차·가전 등 첨단 제품까지 공급망 전반을 손에 쥔 채 초저가 공세로 주요국 산업을 고사 위기로 몰고 있다. 알리·테무 등 중국 온라인 쇼핑 플랫폼은 미국 아마존과 한국 쿠팡 등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최근 출시된 전기차엔 중국 배터리 업체의 리튬인산철(LFP) 배터리가 잇달아 탑재되고 있다.

중국의 공세로 자국 산업이 붕괴 위기에 처하자 세계 각국은 부랴부랴 중국산 제품에 관세 인상 등의 조치에 나섰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물론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 중국과 가까운 국가들도 철강, 화학제품 등에 대해 고율 관세 부과에 착수했다. 그러자 중국은 과거 선진국이 치웠던 사다리를 무기로 쥐고 휘두르고 있다. 미국 호주 등의 ‘반덤핑 관세’에 WTO 제소로 반격하며 무역 장벽을 낮추라고 요구한다.

각국 정부의 ‘중국 봉쇄령’에도 기업들은 중국으로 달려가고 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28일 중국 2인자인 리창 국무원 총리를 깜짝 방문해 “우리는 중국과 여러 해 인연을 이어왔다”며 공개 구애를 펼쳤다. 그에 앞서 열린 베이징 모터쇼에도 미국 GM과 독일 폭스바겐그룹, 일본 닛산 등 완성차 기업 CEO들이 총출동했다. 애플 엔비디아 등 미국 빅테크 기업도 중국 내수시장 재진입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산업계 인사들은 “정부는 중국을 배척해도 기업은 중국을 도저히 놓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2001년 중국의 WTO 가입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가 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인 경제적 자유를 도입했다”며 환영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체제 변화 대신 시진핑 국가주석의 장기 집권 시대를 택했다. ‘중국몽’으로 대표되는 패권 경쟁을 벌이다 내부에 산적한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외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해 과잉생산 지경에 이른 자국산 원자재와 완제품을 해외로 싸게 수출하는 식으로 침체된 내수 경기를 타개하고, 글로벌 산업 패권을 쥐겠다는 것이다.

국제 무역 질서의 변화에 20여넌 전 사다리 걷어차기는 어느 덧 흘러간 이론이 됐다. 과거 사다리를 걷어차던 국가들이 보호무역을 외치고, 후발 국가인 중국이 자유무역을 외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져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사설에서 “중국산 자동차에 대한 EU의 관세 조치는 EU 자동차 기업들의 숨통을 틔우기 위한 것”이라며 “(자동차산업) 경기장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은 보호무역주의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11월 미국 대선의 유력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멕시코산 중국차에 ‘관세 100% 부과’를 천명했다.

반면 시 주석은 최근 독일 올라프 숄츠 총리와 만나 “중국은 대외 개방이라는 기본 정책을 견지하고 있다. 공정하고 개방적인 환경을 제공해 달라”고 촉구했다. 돈과 힘의 논리로 좌우되는 세계 무역의 엄혹한 현실에서 이런 광경은 희극일까, 비극일까. 분명한 것은 한국 경제는 휘두를 무기도, 막아낼 방패도 마땅치 않다는 사실이다.

양민철 산업1부 기자 liste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