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받은 공무원 퇴직문서... 9살 아들은 소원을 빌었다

오영식 2024. 5. 3.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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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손잡고 세계여행] 트레비 분수에서 아들이 준 감동

2022년 9월 30일부터 2023년 4월 14일까지 9살 아들과 한국 자동차로 러시아 동쪽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서쪽인 포르투갈 호카곶을 지나 그리스 아테네까지 약 4만 km를 자동차로 여행한(3대륙, 40개국, 100개 도시) 이야기를 씁니다. <기자말>

[오영식 기자]

 - 지난 기사 '돈 먼저 벌고 행복은 나중에? 아빠는 거꾸로 할거야'(링크)에서 이어집니다. 

아들과 자동차로 세계여행을 계획하며 가장 걱정을 많이 했던 도시 중 하나가 바로 이탈리아의 '로마'였다. 로마는 파리, 바르셀로나와 함께 관광객만큼이나 소매치기가 많은 곳이어서 나는 우선 차를 안전한 곳에 주차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콜로세움에서 4km 정도 떨어진 시내 한 복판이면서도, 높은 담장으로 가려진 주차장이 있는 주택을 숙소로 선택했다.

전 세계 관광지의 '엄친아' 로마 
  
▲ 로마 중심가의 숙소 유럽의 관광지에서는 안전한 주차장이 아주 중요하다
ⓒ 오영식
 
우리 부자는 한국에 있을 때 세계의 유명한 도시를 여행하는 보드게임을 자주 했었다. 로마에 도착한 후 우리는 제일 먼저 보드게임에 나오는 로마의 랜드마크를 보러 갔다.
"태풍아, 저기 보여? 저게 콜로세움이야."
"우아~ 보드게임에서 본 거랑 진짜 똑같네?"
"그래. 저게 만든 지 2천 년 된 거래."
"아빠, 근데 진짜 커."
  
▲ 로마의 콜로세움 로마의 랜드마크, 전쟁 포로인 검투사와 맹수의 전투 경기가 벌어진 원형 경기장으로 약 2천년 전에 지어졌다.
ⓒ 오영식
 
아들과 콜로세움 주변을 걸으며 구경했다. 로마는 정말이지 콜로세움뿐만 아니라 눈길이 가는 곳마다 웅장하고 화려한 대리석 건축물이 줄지어 있었고, 거리는 관광객들이 넘쳐났다. 나는 천방지축 장난치며 뛰어다니는 아들 손을 잡고 눈을 카멜레온처럼 양쪽으로 살피며 긴장한 채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으로 갔다.

로마는 콜로세움이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사실 곳곳에 아름답고 유서 깊은 광장과 건축물들이 널려있어서 어딜 가도 볼거리가 넘쳐났다. 로마의 관광지를 다 돌아보려면 한 달도 부족할 것만 같았다.

이런 도시를 9살짜리 아들과 모두 돌아보는 건 처음부터 생각할 수도 없어서 아들과 꼭 보고 싶은 곳만 줄이고 줄여서 동선을 짰다. 그렇게 줄여서 선택한 곳이 콜로세움과 나보나 광장, 판테온, 성 베드로 대성전, 스페인광장 그리고 트레비 분수였다. 대략 1시간 30분 정도 걸으면 되는 거리였고, 아들에게도 별 무리가 안 될 것 같았다.

이탈리아에 한 번도 여행 오기 힘든 어른들 특히,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조차도 아쉬운 일정으로 여겨지겠지만, 어린 아들과 여행하며 최대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계획한 곳이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

콜로세움을 돌아보고 나보나 광장으로 가는데, 역시나. 아들은 걷는 시간이 30분을 넘자 투덜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달간 아들과 여행하며 요령이 생긴 아빠의 일정에는 이미 아들이 힘들어할 만한 거리마다 비장의 무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나 다리 아파."
"어~ 이제 다 왔어. 저기 보이지? 저기 가서 일단 앉아. 태풍이가 좋아하는 디아볼로 피자 먹고 가자~"
"진짜? 와~"

아들은 좋아하는 피자 얘기에 부리나케 카페로 달려갔다. 우리는 나보나 광장 노천카페에서 잠시 쉴 겸 점심을 먹었다.

2천 년 전 거대한 전차 경기장이었던 나보나 광장은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고, 잠시 쉬기에 아늑할 뿐만 아니라 볼거리도 아주 많았지만, 아들이 피자를 먹는 동안 나는 다음 동선을 부지런히 확인했다.

나보나 광장 가까운 곳에 있는 '판테온(Pantheon)'은 모든 신들의 신전이라 불린다. 미켈란젤로는 이곳을 '천사의 설계'라고 부르며 찬양했다고 한다.

실제 웅장한 대리석 기둥이 세워진 입구를 통해 내부로 들어가자, 둥근 원형의 내부 벽면과 함께 천장이 눈에 띄었다. 아주 큰 돔형 구조의 천장인데 가운데 부분이 뚫려있었다.
  
▲ 판테온 모든 신들의 신전이라 불리며, 미켈란젤로가 '천사의 설계'라고 찬양한 돔형 건축물이다
ⓒ 오영식
 
판테온 돔의 지름은 43m로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보다도 커, 현재까지 세계 모든 건축가에게 돔 건축의 교과서로 활용된다고 한다. 이 거대한 돔의 무게가 약 4500톤이나 나간다고 하는데 기둥 하나 없는 구조에 그런 무게를 버티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정말 경악할 만한 건축 기술을 가진 로마의 역사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중앙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바티칸 시국(Batican city)은 허리높이의 낮은 울타리로 이탈리아와 국경이 구분되어 있었고, 한쪽에 출입문으로 보이는 곳이 열려있어 안으로 들어갔다.
 
▲ 바티칸 시티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와 성 베드로 대성전
ⓒ 오영식
   
바티칸으로 들어가면 유럽에서는 보기 힘든 아주 넓은 광장이 있고, 광장 중앙에는 과거 이집트에서 가져온 25m의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있다. 그리고 광장 뒤로는 성 베드로 대성전이 보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라고 하는데 멀리서 보는데도 아주 웅장했다. 광장을 감싸고 있는 회랑을 따라 길게 늘어선 대기 줄로 가서 기다리다 1시간여 만에 입장할 수 있었다.

"태풍아, 여기가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야."
"그래? 아빠, 근데 다른 데서 본 성당이랑 다르긴 다른 거 같아. 엄청나게 커."
"그래. 여기가 전 세계 신부님들의 대장이 있는 곳이야. 그분을 교황이라고 불러."
"교황?"
"응, 바티칸은 교황이 대통령이야."
"신기하네~"

성 베드로 대성전은 내부가 아주 커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둘러보는데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마치 시골에서 태어나 아직 2층 건물도 보지 못했던 내가 2층, 3층 건물도 아니고 처음으로 서울의 63빌딩을 본 기분이 들었다.
  
▲ 스페인계단 스페인 광장과 성 베드로 대성전이 보인다
ⓒ 오영식
 
저녁 노을이 질 무렵 아들과 스페인광장으로 갔다. 광장에 가까워지자, 주변은 명품 판매점이 모여있었고, 저 멀리 큰 계단 위에 많은 사람이 앉아있었다. 아들과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다.

계단 맨 위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녁놀과 함께 우뚝 솟은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이 보였다. 스페인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노을로 물든 로마의 풍경'은, 평소 별로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마치 '와인 한잔 하지 않을래?'라고 말하는 듯했다.

트레비 분수에서 아들이 몰래 빈 소원

이번엔 아들과 마지막으로 트레비 분수로 향했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젤라토의 본고장인 로마에서 가장 맛있는 젤라토를 먹여주고 싶어 분수 바로 옆에 있는 젤라토 가게로 들어갔다.

"태풍아, 젤라토 원조가 이탈리아잖아. 여기가 제일 맛있는 젤라토 가게야. 먹어봐~"
"진짜야? 빨리빨리~ 딸기 맛으로 달라고 해~"

아들은 트레비 분수는 관심 없다는 듯 분수를 등지고 나를 보며 젤라토를 맛있게 먹었다. 나는 그런 아들과 트레비 분수를 흐뭇하게 보며 아들에게 말했다.

"아, 참! 여기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빌면 들어준대~"
"그래? 응, 알았어~"

아들은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젤라토만 맛있게 먹었다.

"태풍아, 오늘 힘들었지?"
"응, 다리 아파. 그래도 젤라토 먹으니까 괜찮아졌어."
"이제 바로 숙소 갈 거니까. 가서 푹 쉬자. 아빠도 힘드네…. 아빠도 이제 늙었나 봐."

나도 아들 옆에 앉아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그러자 아들은 젤라토를 먹으며 염색을 못 해 흰머리가 많아진 아빠를 곁눈질로 힐끔힐끔 보면서 대답했다.

"아냐~ 아빠 안 늙었어~"
"아냐~ 아빠도 이제 늙었나 봐. 이제 아빠도 많이 걸으면 힘들어. 할아버지 됐나 봐~"

아들한테 아빠도 힘들 때가 있다고 알려주려 장난스럽게 투정하듯 말했더니, 아들은 울먹이며 말했다.

"아냐~아냐~ 아빠 안 늙었어" 하더니 내 손을 꼭 잡는다.

아들이 젤라토를 다 먹어 숙소로 가려고 일어나려는데 아들이 갑자기 말했다.

"아빠, 잠깐만 기다려 봐. 나 동전 한 개만 줘."
"동전은 왜?"
"나 트레비 분수에 소원 빌게."
"아, 그럴래?"

아들 손에 동전을 한 개 주고는 멀리서 지켜봤다. 아들은 분수를 향해 동전을 던지고 잠시 눈을 감았다.

"아빠, 다 했어. 이제 가자."
"소원 뭐 빌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아니, 안 돼. 말 안 해줄 거야."
"그래, 알았어."
  
▲ 트레비 분수 트레비 분수 주변에는 맛있는 젤라토 가게가 많이 있다.
ⓒ 오영식
 
아빠 위하는 아들의 마음

숙소에 돌아와 아들을 쉬게 하고 서둘러 혼자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왔다. 저녁은 오랜만에 삼겹살을 구워 먹기로 했다.

오늘은 내가 국가공무원에서 43세의 이른 나이에 퇴직한 날이다. 육아휴직을 내고 아들과 여행 중이지만, 여행 전 이미 사직서를 제출했고, 퇴직 처리가 오늘 날짜로 된 것이다. 짧지 않은 공무원 생활 20년 기념을 이탈리아 로마에서 하는 것 또한 추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풍아, 오늘은 아빠가 삼겹살에 소주 한 잔하고 싶다."
"삼겹살이랑 소주? 왜? 오늘 무슨 날이야?"
"응, 오늘은 아빠가 그동안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일을 그만둔 날이야. 태풍이 어릴 동안 더 많이 놀고 더 행복하게 살려고."
"그래?"
"우리 더 행복하게 살자. 짠~"

퇴직 기념 만찬을 아들과 맛있게 먹고 자려다 오늘 트레비 분수에서 빈 아들의 소원이 궁금해 아들의 일기장을 열어보았다. 일기장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트레비 분수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오늘 피자도 먹고 많이 걷다가 트레비 분수에서 젤라토를 먹었는데 엄청 맛있었다. 역시 젤라토는 이탈리아가 맛있는가 보다. 아빠가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고 해서 소원을 빌었다. 

'우리 아빠 흰머리 없어지게 해 주세요. 하늘나라에 가면 안 돼요. 저랑 백 살까지 살게 해 주세요.'>

웃음이 났다. 나는 아직은 어린 아들에게 죽음에 대해 쉽게 설명하기 위해 아빠도 늙어서 검은 머리가 모두 하얗게 변하면 하늘나라에 간다고 말해주곤 했었다. 아빠랑 단둘이 살고 있는 아들은, 아빠가 늙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게 걱정이 되었나 보다.

'태풍아, 아빠 아직 검은 머리 많아~'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여행 기간 내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으나, 일부 내용은 기자의 저서<돼지 아빠와 원숭이 아들의 흰둥이랑 지구 한 바퀴>에 수록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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