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햇살 공부, 비 공부, 그래서 땀 공부

2024. 5. 3.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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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령(이화여대 부교수·호크마교양대학)

텃밭에서 노동으로 풍경이
바뀌고 열매가 맺어지는 걸
본다. 자연을 몸으로 배운다

대학에서 맡은 정원 가꾸기(가드닝) 교양 수업이 벌써 5년째에 접어들었다. 사실 나는 정수진님의 책 제목인 ‘식물 저승사자’(지콜론북, 2018)로 불려도 될 만큼 화분 여러 개를 고사시킨 경력자였다. 이런 내가 가드닝을 가르치게 된 것은 대학 동료들과 인류세 세대를 위한 새로운 형태의 인성교육을 고민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윤리학에 기초하여 인성교육을 해온 입장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도전이었다. 1년여의 준비시간 동안 우리 교수진은 멘토 선생님의 지도로 도시농부 과정을 수료했다. 방학에는 미국 대학에 출장도 가고 일본 대학에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수십년 경력의 농부도 변화무쌍한 자연의 심통 앞에 속수무책인 것이 농사 아니던가!

당연히 준비 기간 내내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수업 텃밭의 대형 화분에 흙을 처음 붓던 날, 걱정은 기대로 단박에 바뀌었다. 양손 가득 흙을 만지며 적당히 몸을 움직이니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든 평안함이 찾아왔던 것이다. 어릴 적 놀던 소꿉놀이 흙장난 같기도 하고,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슬라임놀이 같기도 했다. 손은 분명히 더러워졌는데 마음은 오히려 개운해졌다. 흙이 가진 힘이었다.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이번 학기에도 서로 얼굴도 이름도 몰랐던 학생들이 흙을 손에 묻히고 작업한 지 2주 만에 텃밭에서 쉼 없이 재잘대며 웃음꽃을 피웠다. 지겨운 입시에서 해방된 ‘새내기’도, 취업용 요건 쌓기에 지친 ‘정든내기’도 텃밭에서는 모두 똑같은 도시농부 초년생이 되었다.

학생들이 텃밭에서 처음으로 배우게 되는 것은 자신들의 체력이 3월 셋째주 부드러운 봄 햇살에도 75분 수업을 온전히 버티기 힘든 수준이라는 사실이다. 화분의 흙을 뒤집어 섞는 비교적 단순한 노동에도 “덥다” “힘들다”는 곡소리가 여기저기 흘러나왔다. 그렇게 75분의 햇살의 무게를 처음 제대로 느껴본 학생들은 교수가 시키지 않아도 단톡방에서 삼삼오오 20대 여대생에게 쉽게 어울리지 않을 ‘잔꽃 무늬 마스크형 농사 모자’를 공동구매했다. 그러고는 다음 수업 시간에 같은 모자를 쓰고 와 깔깔 웃어대며 사진을 서로 찍어댄다. 그런데 누구도 자신들을 지치게 하는 햇살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 햇살이 며칠 전 화분에 직접 심은 열무 씨와 완두콩 씨의 싹을 틔우고, ‘아주 심기’를 한 고추 모종과 방울토마토 모종의 줄기와 잎을 키우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학기가 중반을 향해 가면 매일 순번을 정해 물을 주고 가꾸는 일을 부담으로 느끼며 꾀를 부리는 이들이 하나둘씩 생긴다. 그렇게 귀찮음과 버거움에 텃밭 오는 것이 힘들어질 즈음 신기하게 늦은 봄비가 내린다. 그때 학생들은 하루나 이틀 치의 물주는 노동을 피할 수 있는 게 농부에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깨닫는다. 왜 ‘단비’가 ‘단비’인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자연을 ‘소비욕’이 아니라 ‘경외감’으로 만나는 경험도 쌓여가는 것이다.

가드닝 수업에서 학생들은 자연의 이치를 배운다. 그러나 결국 텃밭에서 이러저러하게 행하는 작거나 큰 노동으로 텃밭의 풍경이 바뀌고 열매가 맺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햇살 공부에서 비 공부를 거쳐 땀 공부로 나아가는 것이다. 지난주 학생들은 수업에서 파전을 해 먹기 위해 봄 쪽파를 수확한 뒤 옹기종기 앉아 다듬기 시작했다. 파는 깨끗이 다듬기가 어려울 정도로 잘아서 학생들이 애를 먹었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여러분, 혹시나 시장에서 파를 다듬어서 파시는 할머니를 만나면요, 우리 값이 비싸다고 깎지 맙시다. 겉으로 보기에 단순해 보여도, 단순해서 더 어려운 노동이거든요.” 고맙게도 학생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선뜻 대답해 주었다. 나는 이들이 햇살과 비, 그리고 땀을 배운 사람답게 세상의 연약한 존재들을 귀히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고 있다고 믿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니.

김혜령(이화여대 부교수·호크마교양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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