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개혁을 위해 시민들의 실질적 참여 보장 선결돼야

허현희 2024. 5. 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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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현희]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에 반대하며 일부 병원 교수들이 자체 휴진에 나선 4월 30일 대구 한 대학병원 진료실에 의사 가운이 남겨져 있다.
ⓒ 연합뉴스
 
두 달 넘게 지속되고 있는 의사-정부 갈등으로 환자와 시민이 지쳐있다. 부산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고속열차 옆자리에 앉은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의료 공백에 관한 얘기로 집중되었다.

그는 인천에서 일하는 남편이 작년 11월 전립선암 3기 진단을 받았는데 의료 공백으로 수술 날짜를 잡지 못하다가 겨우 5개월이 지나서야 수술을 하게 되었다며 유방암 재발로 수술이 급하지만 아직 수술날짜를 받지 못한 친구의 딱한 사정까지 전했다. 지역엔 의사가 부족하니 의대 증원은 필요하지만 의사 증원 수만 따지지 말고 지역·필수의료에 종사할 의사를 어떻게 교육하고 지역에 남게 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며 갈등을 조정하지 못하는 정부가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애견숍을 운영한 그는 평소 의료정책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이번 의료공백 사태를 계기로 환자의 가족이자 시민으로서 건강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현재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의정 갈등에 대해 각 분야의 시민들은 할 말이 많은데 상대적으로 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거나 환자 소수 집단의 의견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의사증원과 같은 의료 '필요'를 정의할 때 과학적인 추계와 전문가 의견도 검토해야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사안에 대해 충분히 정보를 얻고 숙의를 통해 의사결정을 하는 보편적 합의 과정이다.

정부는 지난 4월 25일부터 의료개혁을 위한 사회적 논의를 하겠다며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의료개혁특위)'를 출범시켰지만 시민들의 기대 수준에 못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미 특위 활동 시작 전부터 위원회 구성에서 병원협회 등 의료공급자 편중이 심하고, 환자와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위원의 구성 비율이 낮으며, 의료산업화를 주도했던 이명박 정부 인사가 위원장을 맡게 되어 공익적인 목적이 강한 지역·필수의료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지 우려하는 의견이 많았다.

더욱이 대한의사협회(의협) 신임 회장은 의사증원 등의 '원점 재검토'를 촉구하며 의료개혁특위를 폐지하고 정부가 의사들과 일대일로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는 의료전문가가 시민에게 필요한 의료적 '필요'가 무엇인지 결정하고, 어떠한 의료서비스를 사회에 공급해야 할지 처방을 내릴 수 있다는 특권 의식을 대변하는 것이다. 의정 대립 과정에서 정부와 의료계 모두 환자와 시민을 의료 공백의 피해자로만 호명할 뿐 의료정책 결정의 주체로서 이들의 역할과 참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부재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의료개혁을 위한 정책 결정을 전문가들의 손에만 맡겨둔다면 환자와 시민이 의료개혁을 통해 과연 얼마나 의료안전망의 보호를 받고 건강권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원론적인 문제는 절대로 제기되지 않을 것이다. 또 지역·필수의료 위기의 원인을 단순히 의사들의 이익 추구에서만 찾는다면 의료의 지역 불평등을 낳는 원인인 수도권 대형병원 집중, 즉 시장 집약적 의료의 왜곡된 체계와 의료인력 내 불평등한 권력구조, 사회문제의 병리화, 사후 대응적 치료수요 증가와 의료 의존 등 본질적인 문제는 논의되지 않을 것이다.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각국은 건강 및 보건의료분야의 정책, 서비스, 연구 전 영역에서 환자와 시민의 참여를 중요하게 다루고 활성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시도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코로나 이후 악화된 건강불평등을 해소하고 지속가능한 보건의료체계를 만들기 위해 법제화를 통해 국가보건서비스(NHS), 지방의회, 시민사회단체가 협력하여 통합돌봄체계를 구축하도록 했다.

이 정책은 환자들과 시민들이 보건의료서비스에 관한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여 필요한 정보를 얻고,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질 수 있게 하며, 궁극적으로 건강에 대한 통제력을 갖는 등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은 팬데믹 기간 동안 행정명령을 통해 '코로나19 건강형평성 태스크포스 위원회'를 만들고 감염병 대응뿐만 아니라 일상 회복을 위해 소수자를 비롯한 건강취약집단 대표를 위원으로 위촉했다. 위원 구성을 살펴보면, 전문가뿐만 아니라 고등학생연합대표, 홈리스지원활동가, 인디언 등 선주민 대표, 장애인 당사자, 가사돌봄노동자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의 활동을 통해 정부 권고안을 내놓았다.

국내 건강 및 보건의료 분야에서는 개별 정부의 리더십에 따라 시민과 환자 참여의 범위와 수준은 상이했지만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한국적 맥락에서 보건의료분야의 시민참여는 시민사회, 환자단체, 노동조합, 사회적경제 등을 중심으로 정책 의제를 발굴하고 사회 변화에 참여하면서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옹호하는 권익 주창의 역할과 정부의 파트너로서 '공익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서비스 제공자의 역할을 했다.

특히 보건의료정책 의사결정과정에서 이뤄진 시민참여의 형태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국민참여위원회',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시민참여위원회,' 서울시 '시민건강위원회' 등 제도화된 협의체에 참여하는 방식이 대다수이다. 하지만 시민과 환자가 의료정책 결정권을 가진 주체로서 참여하기 위해서는 참여적 거버넌스가 제도화되어야 한다.

하버드대학교 케네디공공정책대학원의 아천 펑과 위스콘신대학교 사회학 교수 에릭 올린 라이트는 참여적 거버넌스는 모든 시민이 평생 생활터와 일터의 거버넌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확장된 거버넌스의 진화라고 말한다. 복잡한 지역·필수의료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공론화의 결과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할 것이다. 공론화 과정에서 다양한 관점을 가진 시민들이 의견을 자유롭게 공유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의료개혁과 의정갈등 해결을 위한 사회적 논의에 당사자인 시민과 환자의 실질적 참여를 제한한다면 겉으로는 시민과 환자를 '위한' 의료개혁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나 시민과 환자에 '의한' 좋은 의료개혁은 아닐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건강세상네트워크 공동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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