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돼지 유전자' 훔치려고 내려온 간첩, 허무한 결말

양형석 2024. 5. 2.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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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수상한 <간첩 리철진>

[양형석 기자]

서울예대 연극과 출신의 장진 감독은 군 복무 중에도 틈날 때마다 내무반에서 희곡을 썼을 정도로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1995년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연극 <허탕>과 <서툰 사람들>을 연출해 단숨에 연극계의 젊은 기수로 떠오른 장진 감독은 1998년 만 27세의 나이에 <기막힌 사내들>을 만들며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조감독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감독으로 데뷔하는 것은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장진 감독의 데뷔작에 대한 관객들의 평가는 냉정했다. 베테랑 배우 최종원과 양택조를 비롯해 대중들에게 익숙한 이경영, 오연수 등이 출연했던 <기막힌 사내들>은 서울 관객 1만 4000명에 그치며 흥행에 실패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아무리 연극계에서 떠오르던 무서운 신예라 할지라도 많은 자본이 투자되고 다양한 취향을 가진 관객들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영화에서 성공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장진 감독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대한 충무로의 기대는 여전했고 장진 감독은 이듬해 곧바로 차기작을 만들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장진 감독은 1999년에 개봉한 두 번째 장편영화를 통해 2000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작품상과 시나리오상을 휩쓸었고 서울에서만 17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배우 유오성의 첫 영화 주연작이기도 했던 휴먼 코미디 <간첩 리철진>이었다.
 
 <간첩 리철진>은 2000년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부문 작품상과 시나리오상을 휩쓸었다.
ⓒ (주)시네마서비스
 
과거와 많이 달라진 21세기 영화 속 간첩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범죄신고 112, 화재신고 119, 간첩신고 113'이라는 교육을 받았을 정도로 간첩은 위험하고 무서운 존재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간첩은 국가요인 암살이나 체제전복을 노리는 등 국가 안보에 엄청난 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그려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북한과 북한 주민을 다루는 시선이 다양해지면서 영화에서도 과거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 간첩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2010년에 개봉한 장훈 감독의 <의형제>는 영화 역사상 가장 잘생긴 간첩이 등장하는 영화다. 김정일 정치군사대학 출신의 남파공작원 송지원(강동원 분)은 북한으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히면서 도망자 신세가 된다. 그러던 중 국정원에서 해고당한 흥신소 대표 이한규(송강호 분)와 함께 살면서 묘한 우정을 쌓는다. 송강호와 강동원의 연기 앙상블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던 <의형제>는 전국 55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2012년에는 아예 제목부터 <간첩>인 간첩을 소재로 하는 영화가 개봉했다. 훗날 <내부자들>과 <남산의 부장들>을 연출하는 우민호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김명민과 염정아, 유해진, 고 변희봉 등 캐스팅도 제법 화려했다. 지령을 받고 남파한 간첩이 아닌 수십 년 동안 남한에 거주하는 고정간첩의 이야기를 다룬 <간첩>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광해, 왕이 된 남자>에 밀려 만족할 만한 흥행성적을 기록하진 못했다.

지난 4월 28일 tvN 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 기록을 세우며 종영한 <눈물의 여왕>에서 주인공 백현우를 연기했던 김수현이 주연을 맡은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남한에 동네 바보로 잠입한 간첩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동명의 웹툰을 영화화한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높은 화제성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김수현의 인기에 힘입어 695만 관객을 동원했다.

드라마 <아이리스>와 영화 <포화 속으로>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였던 빅뱅의 래퍼 최승현은 2013년 <동창생>을 통해 데뷔 후 처음으로 단독 주연을 맡았다. 최승현이 연기한 리명훈은 낮에는 강대호라는 이름의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지내고 밤에는 남파공작원으로 활동하는 인물이다. <동창생>은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평가 속에서도 100만 관객을 돌파했지만 손익분기점(150만)은 넘기지 못했다. 

목숨 건 노력도 윗선 결정에 무용지물 
 
 유오성은 첫 단독 주연작 <간첩 리철진>의 성공 이후 배우 생활에 '꽃길'이 열렸다.
ⓒ (주)시네마서비스
 
사실 <간첩 리절진>은 개봉 당시만 해도 크게 주목받던 영화는 아니었다. 장진 감독은 데뷔작 <기막힌 사내들>의 흥행 실패로 관객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고 <비트>의 태수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유오성 역시 주연 배우로서 검증을 받은 적이 없었다. 유해진과 정재영, 신하균 등 지금은 영화계에서 확실히 자리잡은 쟁쟁한 스타 배우들도 <간첩 리철진> 출연 당시엔 무명 또는 신인에 가까웠다.

하지만 <간첩 리철진>은 장진 감독 특유의 조금 느린 듯하지만 돌아서면 피식 웃게 되는 독특한 웃음포인트와 유오성을 비롯한 배우들의 진지한 듯 유쾌한 연기, 그리고 가볍지 않은 주제의식이 어우러지면서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9년 5월에 개봉해, 그해 2월 한국 영화 흥행 기록을 세웠던 <쉬리>와 여름방학 성수기를 피한 것도 <간첩 리철진>에게는 행운이었다.

영화에서 리철진(유오성 분)은 대통령 암살이나 거짓정보를 통해 남한체제를 흔들려는 거창한 목적이 아닌 남한 과학자가 개발했다는 '슈퍼돼지 유전자'를 훔치기 위해 남파됐다(역시 세계 어느 나라나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게 없다). 하지만 리철진은 남한에서 택시를 잘못 타는 바람에 공작금을 모두 도둑 맞고 무일푼으로 자본주의에 찌든 고정간첩 오선생(박인환 분)의 집에 신세를 지면서 그의 딸 화이(박진희 분)를 만난다.

리철진은 영화 후반 오선생과 힘을 합쳐 어렵게 슈퍼돼지 유전자를 탈취하고 북으로 돌아가기 전 홀가분하게 남한에서의 마지막 커피를 마신다. 하지만 그때 TV에서 한국정부가 북한에 슈퍼돼지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리철진이 목숨을 걸고 손에 넣은 슈퍼돼지 유전자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됐다. 그렇게 견딜 수 없는 허무함에 휩싸인 리철진은 눈물을 흘리며 북한 공작원의 총을 빼앗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지나치게 강렬한 인상 때문에 데뷔 후 꽤 오랜 기간 조·단역에 머물렀던 유오성은 1998년 드라마 <내일을 향해 쏴라>를 통해 주연으로 가능성을 보인 후 <간첩 리철진>에서 처음으로 원톱 주연을 맡았다. 그 후 <주유소 습격사건>으로 대중들에게 친숙한 배우가 된 유오성은 2001년 <친구>를 통해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배우로 등극했다. 그만큼 유오성에게 첫 단독주연을 맡은 <간첩 리철진>은 남다른 의미를 가진 작품이다.

영화 속 숨은 주역이었던 택시강도 4인방
 
 <간첩 리철진>의 택시강도 4인방은 오늘날 대중들에게 익숙한 배우들의 무명 시절이었다.
ⓒ (주)시네마서비스
 
1998년 <여고괴담>에서 전교 1등 소영 역을 맡았던 박진희는 <간첩 리철진>에서 고정간첩 오선생의 딸 화이를 연기했다. '화이'는 <기막힌 사내들>부터 <킬러들의 수다>까지 장진 감독 영화에 출연하는 여주인공 이름인데 '오화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아서인지 영화 내내 성을 빼고 '화이'로만 불렸다. <간첩 리철진>에서 처음 호흡을 맞췄던 유오성과 박진희는 2003년 장형익 감독의 <별>에도 함께 출연했다.

연극과 드라마, 영화, 뮤지컬을 넘나들며 60년에 달하는 연기 내공을 자랑하는 배우 박인환은 <간첩 리철진>에서 택시강도를 당하고 무일푼이 된 리철진을 거두는 고정간첩 오선생 역을 맡았다. 남한에서 청소년 상담소를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오선생은 간첩활동보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더 심각한 평범한 가장이다. 그래도 영화 후반에는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을 떠올리며 리철진의 슈퍼돼지 유전자 탈취를 돕는다.

2000년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충무로를 대표하는 라이징 스타로 떠올랐던 신하균은 아직 신인의 티를 채 벗지 못했던 1999년 <간첩 리철진>에서 오선생의 아들이자 화이의 남동생 우열을 연기했다. 초반만 해도 단순한 문제아 캐릭터였던 우열은 영화 중반 리철진이 은행강도를 때려잡았다는 뉴스를 보고 리철진에게 찾아가 190cm의 거구와 싸워 이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간첩 리철진>의 신 스틸러는 단연 택시강도 4인방이었다. 초반 리철진의 공작금을 훔치면서 등장한 택시강도 4인방은 영화 내내 수시로 등장해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간첩 리철진> 개봉 당시만 해도 관객들에게 낯선 얼굴이었던 택시강도 4인방은 훗날 '천만 배우'가 되는 정재영과 선역과 악역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이문식, 개성파 조연 정규수, <미운우리새끼>와 <신발 벗고 돌싱포맨>에서 활약 중인 임원희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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