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초면 발레 의상 갈아입힌다"…무대 뒤 숨가쁜 이들의 보람 [유니버설발레단 40년 下]

전수진 2024. 5. 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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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40주년을 맞은 유니버설발레단의 김양현 팀장, 문훈숙 단장, 정연주 의상감독, 강낙천 조명감독(왼쪽부터). UBC의 40년을 만들어온 이들이다. 강미선 수석 무용수도 인터뷰에 응했으나 연습 일정으로 촬영엔 함께하지 못했다. 장진영 기자


발레는 종합예술이다. 무용수가 관객의 갈채를 받기까지, 그 무대의 의상과 조명, 장치와 홍보를 꾸리는 스탭들의 노고가 소중한 이유다. 클래식 튀튀부터 장식 소품까지 도맡아온 정연주 의상감독,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일 없이 묵묵히 비춰온 강낙천 조명감독, 공연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해온 김양현 공연사업1팀장을 만났다. UBC의 40년은 이들 없이는 불가능했다.

문 단장과 강 수석이 무대 위를 책임진다면, 무대 뒤에서 남몰래 땀 흘리는 이들도 있으니, 정연주 의상감독과 강낙천 조명감독, 김양현 공연사업1팀장에게도 만남을 청했다. 이들의 손길이 없다면 '잠자는 숲속의 미녀' 오로라 공주도, 심청도 관객을 만날 수 없다


정연주 의상감독 "없으면 있게 하라"


정연주 유니버설발레단 의상감독의 보물창고. 장진영 기자

발레 지도자들이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의상에 아름다운 보석 장석이 그냥 박혀 있는 게 아니다. 관객이 그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도록 포즈를 잡고 움직여라." 의상의 작은 장식 하나에도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튀튀부터 머리장식 티아라까지, 의상감독의 머리와 손발이 항상 바쁘다. 공연에 따라 때론 10초만에 무용수의 의상을 교체해야 하는 일명 '퀵 체인지'도 흔하다. 유니버설발레단(UBC)의 정연주 의상감독은 이 일을 27년째 해오고 있다. 그런 그의 좌우명은 "없으면 있게 하라"라고 한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Q : UBC의 40년 중 27년을 함께 해왔는데.
A : "사람도 그렇듯 40년이란 세월은 기회의 다른 이름인 것 같다. 이젠 뭘 잘하는 지 알고, 뭘 새롭게 개척해야 할지도 보인다.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더 자신있게 추진할 수 있는 시기라고 본다. 쉽진 않았다. 입사하고 IMF가 있었고, 최근 팬데믹까지 여러 위기를 겪었다. 그래도 항상 생각했던 게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공연의 질을 떨어뜨리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자는 것. 무용수부터 스탭까지 오히려 위기가 올 때마다 단결했다. 전화위복이었다."

Q : 팬데믹 후 많은 게 달라졌을 텐데.
A : "원단이며 무용 관련 용품을 제작해오던 작은 기업들이 문을 닫았고, 숙련된 장인들이 일을 그만뒀다. 선택지가 사라진 상황에서 우리는 계속 창작 작품을 올려야 하고, 동시에 (우크라이나 전쟁 등 여러 사정으로) 토슈즈(포앵트 슈즈) 수급이 어려워진 것도 문제다. 돈을 주겠다고 해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래서 대체재를 찾는 게 중요하다. 없으면 있게 해야 하니까."

Q : 의상감독이 된 계기는.
A : "의상을 전공한 뒤 서양화를 더 공부했는데 어느날 그런 생각이 들더라. 공연을 보는데 무대 전체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은 거다. 조명에서 쏟아지는 아름다운 빛, 반짝이는 의상과 무용수들, 무대의 배경 등. 무용수에게 의상을 입히는 건 물감으로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는 맥락과 맞닿아있었다. 일이 너무 즐거웠고, 지금도 즐겁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의상은 모두 정연주 감독의 손을 거친다. 장진영 기자

Q : UBC 소셜미디어에서 '퀵 체인지' 쇼츠 영상이 화제였다.
A : "무용수들은 음악에 맞춰 무조건 달려나간다. 때론 10초도 안 되는 시간에 무용수 한 명에 세 명이 달라붙어서 의상과 장식을 교체할 때도 있다. 바늘에 손을 찔리는 일도 다반사이지만, 무용수 의상이 잘못되는 게 더 (마음) 아프다. 특히 파드되(pas de deux, 2인무)가 의상 손상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미리 고정을 더 단단히 해둔다. 무대에선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가 있다. 미리 준비하고 대비하는 게 습관이 됐다. 오늘의 공연을 보며 다음의 의상을 구상하고 준비한다. 다음에 저 단원은 의상의 뒤를 더 조여줘야겠다는 생각 등등이다. 다 기억할 수가 없어서 노트를 항상 적는데, 그걸 (문훈숙) 단장님이 보시고 놀라시더라. 발레는 다 같이 잘해야 한다. 그래서 종합예술이다."

Q : UBC 50주년, 100주년에 대한 기대는.
A : "우리는 우리만의 창작 발레 작품을 갖고 30여년에 걸쳐 계속 업그레이드해오고 있다는 게 강점이다. '심청' 초연에 쓰였던 의상이 아직도 있다. 지금은 등장하지 않는 불가사리 캐릭터의 옷도 잘 관리하고 있을 정도다. 앞으로도 우리가 하는 매일의 일이 미래를 위한 노력이라고 보고 계속 열심히 즐겁게 할 뿐이다."


강낙천 조명감독 "위기 후 더 똘똘 뭉친다"


유니버설발레단의 강낙천 조명감독. 콘솔은 그의 집이기도 하다. 장진영 기자

무용수들에게 빛을 주고 거두는 일. 강낙천 유니버설발레단(UBC) 조명감독이 15년째 해오는 일이다. 조명감독의 일은 조명 그 이상이다. 음악의 박자를 미리 꿰뚫고 있어야 하며, 무용수들의 동선을 숙지하고 그 타이밍에 맞춰 다채롭게 조명을 내줘야 한다. 무대를 마무리하고 때로 번아웃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일이 즐겁다고 한다. "희열이 장난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그가 평생 잡아온 조명처럼 빛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Q : UBC 40주년 소감은.
A :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는데, 대견하다. 민간 예술단체가 40년을 꾸려왔다는 건 뿌듯한 성취가 아닐까. 하지만 이제 또 다른 시작이라고도 느낀다. 인생도 마흔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니까. 개인적으론 15년차가 됐는데, 팬데믹 등을 거치며 외려 더 단단해졌다고 느낀다. 팬데믹 때 상실감을 서로 창작작품을 만들어내며 이겨냈고, 더 똘똘 뭉치게 됐다."

Q : 조명감독이 된 계기는.
A : "아는 선배 통해 스승님을 소개 받고 천직이라고 느꼈다. 국립발레단에서 먼저 2001년 시작했고 스승님을 따라 UBC로 왔다. 조명이라는 게 참 재미있는 게, 발레 블랑(ballet blanc, 백색 발레)라고 흰색 조명만 쓰면 안 된다. 하얀 색에 푸른 색 또는 붉은 색을 살짝 섞어 포인트를 줘야 한다. 전체적으로 파란 색을 쓸 때도, 파란 색 일색이면 무대가 살지 않는다. 붉은 색 등 다른 색을 섞는 일명 '컬러 믹싱' 작업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무용수와 의상을 빛나게 해준다는 게 엄청난 보람이다."

이곳에서 공연 무대를 보며 종종 눈물을 흘린다는 유니버설발레단의 강낙천 조명감독. 장진영 기자

Q : 무대 전체를 봐야하는 일이라 더 쉽지 않을 듯한데.
A : "무대 당일엔 주로 객석 뒤에 조명 콘솔(제어장치) 쪽에서 보니 아무래도 세밀한 부분까지 팀워크를 발휘하게 되더라. 무용수의 타이즈 색상도 똑같아야 하는 게 발레라는 엄격하지만 아름다운 예술이어서다. 고백하자면 몇 번 울기도 했다(웃음). 무대를 보면서 감동해서다. 최근엔 '춘향'에서 (강)미선 수석무용수가 해후 파드되에서 몽룡의 가슴을 치며 왜 이제 왔냐는 연기를 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왈칵했다. 아마 창작 작품이라서 더 그랬던 거 같기도 하다. 공연 3~4일을 위해 몇 달을 그 생각만 했으니. 재미있는 건, 팬데믹도 겪고 다양한 창작을 하다보니 이젠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는 점이다."

Q : UBC만의 장점은.
A : "우리는 조명과 의상까지 무대의 중요한 부분의 감독이 상주를 한다. 외부 디자이너를 쓰지 않고 상주 감독이 있다는 건 장점이다. 우리 것은 우리가 직접 다 만든다는 자부심이 크다. 그러다보니 여러 노하우들이 쌓였고, K발레를 위한 창작 작품도 자신있게 만들 수 있다. 지금은 우리가 '오네긴'이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판권을 사와서 공연을 하지만, 언젠가 우리도 '춘향'이나 '코리아 이모션 정'의 판권을 해외 발레단에 판매할 때를 꿈꾼다."


김양현 공연사업1팀장 "민간발레단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공연은 이 사람을 통해 관객을 만난다. 김양현 공연사업1팀장. 장진영 기자

어떤 이웃은 운명을 바꾼다. 어린 시절 김양현 유니버설발레단(UBC) 공연사업1팀장의 아파트 같은 층 이웃사촌도 그랬다. "발레단에서 일하는 신사 아저씨"라고 김 팀장이 기억하는 그가 어느날 "선물이다"라며 티켓을 내밀었다. 1988년 UBC의 '심청' 공연이었다. 김 팀장은 그날 꿈을 봤다. "프로그램북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는 그는 "공연이라는 게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구나"를 체감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9년, 그는 UBC의 공연사업을 담당하는 팀장으로 '심청'을 올렸다. 그는 "묘하고 벅차고 눈물이 나더라"며 "이렇게 결국, 원하는 자리에 왔구나, 꿈을 이뤘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Q : 기억에 유독 남는 공연은.
A : "아무래도 2019년 '심청'이다. 열살 때의 내가 떠올랐다. 춤이라는 아름다움을 처음 봤을 때의 그 감동이 되살아났다. 한국의 이야기를 갖고 이런 표현을 할 수 있구나 싶었는데, 그 공연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음에 감사하다."

Q : 그후 팬데믹이 닥쳤다.
A : "발레단 인원을 무용수까지 포함해 3분의 1을 감축해야 했다. 수석 무용수들은 '내 월급을 깎아도 좋으니 후배들이 안 나갔으면 좋겠다'고 했고, 스탭들도 '비용 절감은 해도 공연의 질은 유지하도록 어떻게든 되게 하겠다'며 똘똘 뭉쳤다. 어찌보면 전화위복이었지만 다시 겪고 싶진 않다(웃음)."

창단 40주년을 맞은 유니버설발레단의 문훈숙 단장, 김양현 팀장, 정연주 의상감독, 강낙천 조명감독(왼쪽부터)이 16일 오후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20240416

Q : 민간 발레단 UBC에서 일한다는 것의 의미는.
A : "많은 민간발레단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UBC는 40년 간 한결같이 무대를 올렸다는 의미가 크다. 클래식뿐 아니라 창작 레퍼토리도 꾸준히 만들어냈다. 시대의 부침은 있을지언정,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향한 정성은 계속 쏟았다. 앞으로 50주년, 100주년에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한결같다는 것은 발레의 기본이자 핵심이기도 하다."

Q : 바라는 바는.
A : "발레 무용수들은 은퇴하면 우아하게 살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일 때가 많다. 민간이라서 할 수 있는 영역도 개척하면서, 여러 지원도 더 적극적으로 주어진다면 한국 발레계는 더 폭발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UBC는 민간발레단의 엄마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파이를 독식하는 게 아니라, 함께 파이를 키워가며 상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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