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사명감 페이의 종말

2024. 5. 1.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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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홍택 명지대 겸임교수·작가

공무원도 사명감과 맡은 일 둘로 나눌 필요 없다.
자기 일만 책임감 있게 하면 된다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부분은 ‘열정 페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열정 페이란 말 그대로 ‘열정으로 급여를 대신한다’라는 의미로, 사용자와 근로자의 관계에서 ‘열정과 보람 등의 핑계로 제대로 된 노동의 대가를 노동자들에게 지불하지 않으려는 것’을 통칭한다. 실제로 이런 열정 페이는 2010년대 초중반까지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퍼져 있었다.

하지만 ‘열정과 보람 따위는 됐으니 일한 대로 적법하게 계산해 달라’는 새로운 세대의 요구가 주류가 되기 시작했고, 2018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된 ‘주52시간 근로제’ 등의 제도적 변화가 맞물리면서 열정 페이는 우리 사회에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열정 페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해진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단어가 하나 있다. 그 이름은 바로 ‘사명감 페이’다. 열정 페이가 ‘열정으로 급여를 대신한다’였다면 사명감 페이는 ‘사명감으로 급여 이상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의미로 통한다.

사명감(使命感)은 사전에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하려는 마음가짐’ 정도로 단순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단순히 돈을 받고 주어진 임무를 완료하는 것을 넘어서 일종의 숭고함과 연결된다. 이 사명감의 핵심은 나 자신의 안위보다 시민으로 대표되는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명감과 연결된 직업은 보통 경찰, 소방공무원, 군인, 교사, 의사와 같이 공공의 이익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이들 직업군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종사하는 일’이라는 직업의 정의를 넘어서는 사명감과 봉사 정신이 요구됐다. 지금까지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공공의 영역에 종사하는 누군가를 움직이는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앞으로 사명감 하나로 누군가의 동기를 부여하는 일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전국에서 제일 바쁜 지구대를 지키는 경찰관들의 모습을 다룬 tvN 드라마 ‘라이브’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바로 이 사명감이다. 극 중에서는 묻지 마 범행으로 칼을 맞아 쓰러진 동료와 고등학생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범인에게 총을 쏘아 사망에 이르게 한 염상수(이광수)가 징계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의 사수인 오양촌(배성우)은 ‘저는 오늘 목숨처럼 여겼던 사명감을 잃었다’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평소 나보다 시민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고 움직이는 경찰의 사명감을 강조해 온 그의 울분을 더 크게 느낄 수 있던 장면이다. 이와 같은 장면은 실제 일선 경찰관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과중한 업무를 넘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현장에서 과잉 대응했다는 이유로 민형사 소송에 휘말릴 수 있는 현실에서 더 이상 사명감이란 이름으로 퉁치며 견뎌낼 수 없다.

교사들 사이에서는 예전부터 ‘참교사는 단명한다’라는 말이 돌았다. 이는 학생들에게 참교육을 실천하고자 더 열심히 지도하는 교사가 될수록 학부모들의 민원창구 과녁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15년 차 교사는 면학 분위기를 저해하는 일부 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불타오르는 사명감으로 적극적으로 지도했다가 고소만 당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사명감이 없는 세상’을 받아들이라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단지 불합리한 대우 혹은 필요 이상의 희생 요구를 사명감이라는 이름으로 대체하기는 어려워졌다는 현실을 인식할 필요는 있다. 또한 오랜 기간 사기업에서 일하다 최근 공공기관의 인재개발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한 선배의 통찰력은 참조할 만하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공무원들은 이상하게 사명감을 자기 일과 분리해서 말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 사명감과 내가 맡은 일을 굳이 둘로 구분하지 말고 자기 일만 책임감 있게 완료하면 된다. 그리고 리더는 그 책임감의 영역을 명확하고 형평성 있게 구분해서 일을 배분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임홍택 명지대 겸임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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