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삶의 마지막 계절들

2024. 5. 1.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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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작가 아르투르 슈니츨러가 쓴 '한 시간 더'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주인공은 죽어가는 애인이 최소한 한 시간만이라도 더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죽음의 천사에게 간청한다.

이 남자는 죽음의 천사와 함께 삶의 마지막 한 시간을 양보해 줄 사람을 찾아 나선다.

비록 고통과 가난과 외로움으로 채워져 있다 하더라도 삶의 마지막 한 시간을 양보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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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남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투르 슈니츨러가 쓴 ‘한 시간 더’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이 작품은 애인의 죽음을 눈앞에 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죽어가는 애인이 최소한 한 시간만이라도 더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죽음의 천사에게 간청한다. 천사는 죽음을 앞둔 다른 누군가가 한 시간을 양보해 주면 그의 애인을 위해서 한 시간을 주겠다고 한다. 이 남자는 죽음의 천사와 함께 삶의 마지막 한 시간을 양보해 줄 사람을 찾아 나선다. 고통으로 가득 찬 말기 환자, 외롭고 눈먼 노인, 사형 집행을 앞둔 사형수 등에게 그들의 마지막 한 시간을 간청하지만 모두 다 거절당한다. 비록 고통과 가난과 외로움으로 채워져 있다 하더라도 삶의 마지막 한 시간을 양보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나는 암을 치료하는 일을 전문으로 한다. 암을 치료하는 의사의 일은 어디까지인가. 학생 시절에 교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암 환자에게 더 이상 치료 방법이 없어 의사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교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의사로서 환자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상황은 없습니다. 치료할 약이 없다면 환자가 고통 없이 인생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의사의 역할입니다.” 이 대답은 내가 이 전공을 택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치료할 수 있는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할 때에도 환자들의 마지막 시간을 지켜주는 것.

당연한 일이지만 모든 암 환자를 완치시킬 수는 없다. 일부 환자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더 이상 치료 방법이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환자에 따라 남은 시간이 한 달일 수도, 석 달이나 여섯 달일 수도 있다. 한 달이 남은 아이에게는 그 한 달이 온 생애와도 같다. 그 아이의 하루는 다른 사람의 몇 달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더 치료 방법이 없을 때는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치료보다는 남은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방법을 찾기 위해 부모와 같이 고민한다. “아이가 덜 울고 더 많이 웃을 수 있도록 해 봅시다.”

가끔은 언제 치료를 멈춰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몇 년 동안 난치성 종양을 앓아온 아이가 있다. 어떻게든 치료 방법을 찾아 달라는 부모님의 간청에 여러 차례의 수술과 오랜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를 시행했지만 결국 종양의 진행을 막을 수 없었다. 더 치료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아이의 부모님은 ‘조금만 더’라고 부탁했다. 결국, 올해 초에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병원에 적게 오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늘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간절했다. “우리 아이가 어디에 있든 조금이라도 더 세상에 머무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벚꽃을 한 번 더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올해는 예상보다 벚꽃이 늦게 펴서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아이는 벚꽃놀이를 갈 수 있었다. 이제 아이의 부모는 어린이날과 6월에 다가올 아이의 생일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세상의 풍경이 많다. 여름의 바다와 가을 단풍과 화이트 크리스마스 사이의 어딘가에서 아이의 여정은 멈출 것이다. 아이가 그 마지막 계절을 같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온 생애를 돕는 것과 같다.

수많은 신약이 나오고 있지만 현대의학은 삶의 마지막을 지켜주는 일에서 오히려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러울 때가 있다. 자식이 세상에서 누려야 할 것들을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게 하려는 부모님의 간절함을 보며, 마지막까지 아픈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의학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고경남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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