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뽈터뷰] 김병지 ① 30년 전 브라질·영국의 러브콜, 시대를 앞서간 골키퍼는 K리그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김희준 기자 2024. 4. 3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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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지 강원FC 대표는 선수 시절 K리그에서 숱한 전설을 써내려갔다.

초등학교 시절 주전으로 뛰던 골키퍼 친구가 부상을 당했고, 필드 플레이어 중에 키가 크면서 거리낌 없이 몸을 던지는 걸 즐기는 선수가 김 대표였기 때문에 골키퍼 장갑을 처음 끼게 됐다."원래 골키퍼가 아니었어요. 필드 플레이어였는데 어느 날 골키퍼가 다치는 바람에 골키퍼를 볼 친구가 없었던 거예요. 제가 그때 개구쟁이였어요. 골키퍼는 세이빙하고 넘어지고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골키퍼를 했는데 잘했어요. 친구가 다 낫고 돌아왔는데 그 자리가 없어졌어요. 제가 골키퍼를 계속 하게 됐죠."골키퍼는 운명처럼 찾아왔지만, 축구는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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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지 강원FC 대표. 서형권 기자

[풋볼리스트=구리] 김희준 기자= 김병지 강원FC 대표는 선수 시절 K리그에서 숱한 전설을 써내려갔다. 은퇴 전까지 26년 동안 몸무게 78kg을 유지하는 독한 자기 관리 속에 K리그 통산 최다 출장(708경기), 통산 최다 무교체 출장(153경기), 최고령 출장(45년 5개월 15일) 등 출장과 관련한 기록들을 새로 썼다. K리그 통산 최다 무실점(229경기)으로 골키퍼로서 위대한 기록도 세웠다.


꽃길만 걸었던 것 같지만 이면에는 아픔도 있다. 김 대표는 약 30년 전 브라질, 프랑스, 영국 등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아직 스위퍼 키퍼라는 개념이 희박하던 시절임에도 튀는 골키퍼였던 김 대표는 농담처럼 "내가 은퇴하고 나서야 내 스타일이 대세가 됐다"고 말한다. 소속팀 친선경기와 국제 대회에서 실력과 존재감을 여러 번 보였다. 그러나 당시 종신 서약에 가까웠던 계약 형태 등 구조적 문제에 얽혀 해외 진출이 무산되고 K리그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김 대표는 제법 굴곡이 있던 선수 시절을 돌아보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런 게 인생의 묘미라며 결과적으로 우상향 그래프를 그려나가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지난 22일 '뽈터뷰'를 통해 골키퍼가 된 계기부터 여러 이적 비화, 국가대표에서의 영광과 아픔을 찬찬히 훑었다.


▲ 골키퍼 시작한 계기? 골키퍼 하던 친구가 다쳐서


김 대표가 축구를 시작한 이유는 빨라서였다. 육상으로 시작해 축구로 전향했다. 골키퍼를 하게 된 계기는 개구쟁이였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주전으로 뛰던 골키퍼 친구가 부상을 당했고, 필드 플레이어 중에 키가 크면서 거리낌 없이 몸을 던지는 걸 즐기는 선수가 김 대표였기 때문에 골키퍼 장갑을 처음 끼게 됐다.


"원래 골키퍼가 아니었어요. 필드 플레이어였는데 어느 날 골키퍼가 다치는 바람에 골키퍼를 볼 친구가 없었던 거예요. 제가 그때 개구쟁이였어요. 골키퍼는 세이빙하고 넘어지고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골키퍼를 했는데 잘했어요. 친구가 다 낫고 돌아왔는데 그 자리가 없어졌어요. 제가 골키퍼를 계속 하게 됐죠."


골키퍼는 운명처럼 찾아왔지만, 축구는 그렇지 않았다. 김 대표는 축구가 주는 시련에 맞서 운명을 개척해야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키가 크지 않아 골키퍼와 필드 플레이어를 왔다갔다 했고, 3학년 때는 경기를 뛰기 위해 부산 소년의집으로 전학도 갔다. 축구부로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해 축구팀이 있는 회사에 취직하기도 했다.


김 대표는 상무축구단에 입단하며 프로 축구로 들어서는 실마리를 찾았다. 당시 상무축구단에는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국군체육부대 입대 테스트가 있었다. 김 대표는 시험에 합격해 상무축구단에서 30개월 동안 뛰면서 독보적인 활약으로 프로 팀의 눈에 띄었고, 울산현대호랑이(현 울산HD) 입단에 성공했다.


"상무축구단에 준비하고 테스트를 받아서 들어가게 됐어요. 천만다행으로 상무에 합격해서 전문 축구 선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어요."


"제대하고 나서 바로 입단했거든요. 운동은 똑같았어요. 단지 팀만 달라졌던 거지. 그런데 국군체육부대에 있을 때는 당시 병장 월급이 1만 원이었어요. 그런데 울산현대에서 월급통장을 봤는데 연봉이 960만 원, 월급으로는 80만 원이었어요. 한 달 만에 월급 차이가 80배더라고요. 프로는 다르구나, 큰 차이가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김병지(한국). 게티이미지코리아

▲ 30년 전 왔던 브라질·프랑스·영국의 제안, 종신 계약에 묶인 아픔


울산에서도 김 대표는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줬다. 이를 통해 해외 리그에서도 관심이 쏟아졌다. 1995년에는 플라멩구를 비롯한 브라질 팀들이 김 대표의 이적을 추진했고,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 이후에도 프랑스와 영국의 팀들이 김 대표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실제로 이적이 성사되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성사될 가능성이 희박한 환경이었다. 당시 K리그에서 뛰는 모든 선수들은 계약 만료 기한이 없는 사실상 종신 계약으로 소속팀에서 뛰어야 했다. 김 대표 역시 해외 이적을 위해 투쟁도 불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울산에 남아 몇 시즌을 더 치러야만 했다.


"1995년도 브라질은 플라멩구였고 프랑스, 영국 등 몇몇 팀이 관심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월드컵 이후에 진출할 수 있겠다 했는데 울산현대에 골키퍼가 없다 보니까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아쉬움이 많이 남죠. 지금 문화는 해외 진출에 대해 팀, 국가, 선수 모두 당연히 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때는 거의 다 원클럽맨이었어요. 팀을 위해서 개인의 희생은 감수해야 되는 분위기였죠. 투쟁도 많이 했어요. 투쟁했는데도 불구하고 쉽지가 않더라고요."


"구단에서 무조건 희생만 강요하지는 않았어요. 기본적으로 팀에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줬고요. 금전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보상을 해줬어요. '팀에 필요하다, 해외에서 주는 연봉만큼 우리가 서포팅을 해서 예우를 해줄게'라고 해서 남게 됐던 기억이 납니다."


김병지 강원FC 대표. 서형권 기자

▲ 바다 건너에서 남얘기처럼 들은 포항 이적 소식


김 대표가 이적으로 골머리를 앓았던 건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울산에서 포항으로 이적한 것도 자신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이미 구단 간 합의가 끝난 상황이었고 포항과 연봉 협상을 하는 선택지만 남아있었다. 김 대표는 이를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들었다. 2002 한일 월드컵 개최를 기념해 일본 요코하마에서 한일 올스타와 세계 올스타의 경기를 소화하던 때였다.


"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한일 올스타전을 갔어요. 새해 첫경기였는데 한국에서 전화가 왔어요. 에이전트 일을 보셨던 대표팀께서 '병지야, 너 포항으로 가야된다'라고 얘기했어요. '갈 생각 있니'가 아니었어요. 왜 가야 되냐고 물었더니 울산하고 포항이 합의를 봤다는 거예요. 합의를 봤으니까 연봉을 얘기해보라는 거예요."


"제가 다시 물었어요. 정말 포항하고 울산하고 합의가 끝난 거냐. 끝났다. 그러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예요. 그냥 생각해볼 거냐고 물었으면 제가 고민을 많이 했을 텐데 저한테 남겨진 선택권은 없었어요."


울산과 포항의 라이벌 의식은 1990년대에도 있긴 했으나 김 대표가 이적한 뒤 더욱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김 대표가 포항에 있던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울산이 포항을 상대로 5승 2무 9패로 열세에 처하며 '김병지의 저주'라는 말도 돌았다.


"제가 이적할 때도 포항과 울산은 경기를 많이 붙었지만 동해안 더비 느낌까지는 아니었어요. 제가 이적하면서 김병지의 저주도 있고 얘기가 나온 기억이 나요. 그 이후에 울산과 포항 선수들이 이적을 하게 되면 더비의 중심에 서고, 울산과 포항이 우승 갈림길에서 만나 우승을 확정짓거나 상대 우승을 저지시키는 게 많이 반복되면서 지금까지 왔어요. 그래서 지금 동해안 더비가 재밌습니다."


여담으로 김 대표에게 지금은 동해안 더비가 열리면 어느 팀을 응원하냐고 물었다. 김 대표는 "울산이죠. 프로 시작이 울산이었고 포항보다 울산에 더 오래 있었어요"라면서도 "울산 홈에서는 울산, 포항 홈에서는 포항을 응원합니다"라며 탕평책을 제시했다.


김병지(왼쪽)와 거스 히딩크 감독(가운데 오른쪽). 대한축구협회 제공

▲ 2002 월드컵 0경기 출장이 'K리그 708경기 출장'으로


김 대표의 국가대표 경력은 소속팀 경력만큼 굴곡이 있었다. 처음 국가대표에 발탁된 1995년부터 20세기가 끝날 때까지는 김병지의 시대였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대표팀이 네덜란드에 0-5로 대패하고 차범근 당시 대표팀 감독이 중도하차하는 혼란 속에서도 선방쇼로 비판의 화살을 피했다.


"1990년대 초반에 K리그 팀들이 골키퍼를 외국인 선수들로 영입했어요. 대한민국 골키퍼 성장에는 참 안 좋았던 시기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도움을 받았죠. 왜냐하면 유일하게 저 혼자 경기를 뛰고 있으니까. 국가대표도 경기 뛰는 선수가 가야 되는 거잖아요. 제게 국가대표 기회가 빨리 온 거죠."


"네덜란드에 '오대영'으로 지면서 마음이 많이 상했어요. 월드컵 16강을 위한 기회가 끝난 거잖아요. 다행스럽게도 저에 대한 평가는 기록으로 나왔어요.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0-5로 졌지만 김병지는 잘했다고 언론이 얘기해줘서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기회가 됐죠."


반면 2002 한일 월드컵은 김 대표에게 아픈 기억이다. 지금도 김 대표가 선수 생활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으로 꼽는 파라과이와 칼스버그컵 드리블 사건이 있은 뒤 굳건했던 국가대표 골키퍼 입지가 흔들렸다. 이후 대표팀에 계속 차출됐지만 거스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에서 주전 수문장으로 이운재를 선택했다. 김 대표는 2002년 월드컵을 벤치에서 지켜봐야 했다.


김 대표는 그 기억이 지금도 아픔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선수 경력에 좋은 반환점이 됐다고 회고했다. 그때까지 자기 잘난 맛에만 살았던 김 대표가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고, 이후 14년 동안 선수 생활을 이어오는 원동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제가 참 건방졌던 것 같아요. 팀에 들어가면 에이스였고 K리그에서는 워낙 잘했어요. 히딩크 감독님을 위한 김병지가 아니라 나를 위한 김병지라고 생각했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타협을 못하고 스스로 결과를 잘 못 받아들였어요."


"2002년을 되돌아보면 그 때 32살이니까 은퇴할 나이예요. 그런데 그때 제가 느낀 것 때문에 14년 이상 선수 생활을 더 할 수 있는 이유가 됐죠. 그래서 지금은 히딩크 감독님 만나 뵈면 밉다고 얘기하면서도 잘 지내고, 존경하는 감독님으로 생각하고 있죠."


"2002년 이후에 국가대표가 끝날 것 같다가 2008년에 또다시 국가대표 선발 기회가 제게 주어져요. 그런 것처럼 어려울 때가 있으면 다시 또 올라설 때가 있는 거죠. 우상향이면 돼요. 계속 쭉 가는 인생은 없어요. 많은 걸 배워서 성장하고 이런 게 인생 스토리죠."


김병지 강원FC 대표. 서형권 기자

▲ 김병지에게 '98 김병지 vs 18 조현우'를 묻다


김 대표 말대로 이후 김 대표는 K리그에서 오랫동안 활약하면서 숱한 기록을 남겨 명실상부한 K리그 최고의 골키퍼가 된다. 프로 데뷔를 이른 나이에 하지는 못했지만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 K리그에서만 24년 동안 활약했고, 이제는 모든 K리그 선수들이 김 대표의 선수 시절을 롤모델로 삼는다.


특히 골키퍼를 꿈꾸는 선수에게는 하나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현재 K리그에서 최고의 폼을 보여주는 골키퍼 조현우도 김 대표를 롤모델로 삼았다.


조현우는 김 대표와 선수 경력 궤적이 비슷한 편이다. 하부리그에서 탄탄한 활약을 펼쳐 스스로 몸값을 키웠고, 이를 통해 월드컵까지 승선했다. 울산 수문장의 계보를 잇고 있다는 점도 닮았다.


1998년 월드컵의 김 대표와 2018년 월드컵의 조현우는 흔들리는 대표팀에서 일신의 힘으로 상대 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김 대표에게 1998년 김병지와 2018년 조현우 중 한 명을 선택하라면 누구를 뽑을 거냐고 묻자 곧바로 조현우라고 대답하며 웃었다. 선택은 조현우였지만 그 이유에는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녹아있었다.


"조현우 선수가 어릴 때 저를 보면서 성장했던 선수였어요. 그리고 대학교 때 (조현우를) 지도했던 감독님이 저한테 전화 한 번 했던 기억이 나는데 너만큼 잘하는 선수가 한 명 있다고 했던 그 선수가 조현우 선수예요. 그러면서 대구 갔다가 울산 갔다가 하면서 성장을 했는데 지금도 잘해주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좋고요. 주변에서 약간 김병지 같은 느낌이 있는 헤어스타일, 울산현대 계보에도 들어가 있는 조현우라고 하니까 괜히 좋은 거예요. (조)현우가 나를 멘토로 삼아 멋지게 성장했으니 제 개인적으로 또 감사한 거죠."


K리그 숱한 선수들에게 영감을 준 김 대표는 이제는 똑같이 K리그 전설 반열에 오른 이동국이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이어온 원동력도 됐다. 김 대표는 이동국을 K리그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던 공격수로 꼽으며 작은 일화를 소개했다.


"(이)동국이는 저한테 그랬어요. 동국이랑 같은 팀(포항)에도 있었고 상대로도 만났는데 동국이가 하는 얘기가 그거였어요. '형님, 최대한 오래 하십시오. 그래야 저도 오래 갈 수 있습니다.' 이미지 메이킹이 되잖아요. '병지는 46살인데 41살이 많은 거야?' 이렇게 선입견을 정리해주니까 동국이는 최대한 형님이 오래 하셔야만 저희들이 오래 할 수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김병지(당시 전남드래곤즈).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사진= 풋볼리스트, 대한축구협회,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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