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많은 죄... 평생 모은 것 다 주고도 남편은 살리지 못했다 [박만순의 기억전쟁2]

박만순 2024. 4. 29. 20:2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바다로 이송된 박후근·김순심 부부... 다섯 집안 몰살된 임자면 수도리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남편 살리고 싶거든 숨겨둔 돈 내놓으시오."

그때까지 분주소원들의 갖은 협박에도 꿋꿋이 버티던 김순심(1888년생)은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무릎이 꺾였다. 그렇잖아도 남편이 며칠 전 이들 일행에 의해 자은면 유각리의 자은분주소 옆 남진창고에 갇힌 터였다.

남편의 죄가 무엇일까
 
 지방좌익에 의해 학살된 김순심(좌) 박후근 부부
ⓒ 박만순
 
남편이 분주소에 연행될 때 만해도, '특별히 죄지은 게 없으니 금방 풀려나겠지'라고 마음을 놓았었다. 하지만 한 번 붙들려 간 남편은 소식이 없었다. 밥을 해 아침저녁으로 창고 앞을 서성였으나 창고 앞을 지키는 청년들은 남편 면회를 시켜 주지 않았다.

남편이 붙들려 간 이후 김순심의 주름살은 늘어만 갔다. '남편의 죄가 무엇일까?' 남들에게 특별히 해를 끼친 것 없이 평생을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 재산을 일군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나고 인공시대(인민공화국 시대)가 열리면서 박후근 집안은 반동 집안으로 규정되었다. 결국 남편의 죄는 돈이 많은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인민위원회 사람들의 '남편을 살리려거든 돈을 내놔라'라는 말에 그제야 자신의 잘못도 생각났다. 자신의 잘못은 돈을 내놓지 않은 것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심정으로 김순심은 마당 귀퉁이의 간짱을 묻어둔 곳으로 갔다. 간짱은 생선을 절여놓는 탱크로 그녀의 마당 귀퉁이에는 가로세로 각각 5m×3m, 5m×10m 크기의 것이 있었다. 각각 민어와 조기를 절여놓은 간짱의 뚜껑을 열어 갑바를 꺼냈다.

물에 젖은 돈다발

갑바를 간짱(탱크)에 숨기느라 돌을 매달았다. 그래서 일전에 분주소 사람들이 그곳을 열어 봤을 때도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돌을 묶은 끈을 풀고 갑바를 풀어헤치자 물먹은 현금다발이 나왔다. "와"하는 소리가 터졌다.

간짱은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만들어 물이 새지 않았지만 현금다발을 감싼 갑바는 물이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물에 젖은 돈다발을 말리는 게 우선이었다.

조심해서 돈다발을 사흘포로 옮겨 펼치기 시작했다. 조심한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펴지지도 않았고 약간만 힘을 주어도 지폐가 찢어졌다. "아이고 아까워라"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돈이 거의 말라갈 때쯤 강풍이 불었다.

지폐가 사방으로 날렸다. 청년들이 사방으로 허둥댔다. 그러는 찰나에 허둥대는 청년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근처에 있던 개가 지폐를 물고 뛰었다. "야, 이 개XX야. 거기 서" 전남 무안군(현재의 신안군) 자은면 고장리에서 지폐를 물고 달리는 개와 그 개를 뒤쫓는 촌극이 벌어진 것은 1950년 9월 하순이었다.

김순심이 평생을 모은 돈을 고스란히 내놓았지만 남편이 석방되기는 고사하고 김순심 역시 분주소로 연행됐다. 남편이 잡혀간 지 보름만인 1950년 9월 30일경이었다.

그가 반동분자로 보인 이유
 
 김순심 박후근의 아들 박일만이 한국전쟁 때 전사해 수여한 국가유공자증
ⓒ 박만순
 
'삐걱'하는 소리와 함께 남진창고 문이 열리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남편과 같이 구금되어 있던 이들의 땀내와 오물 냄새가 진동을 했다. "여보" "..." "일만이 아버지" "당신이 웬일이오?" 가슴 시린 상봉을 할 시간도 없었다. 창고 밖에서 청년들의 고함이 터졌다.

박후근·김순심 부부를 비롯해 창고에 갇혔던 이들은 창고 앞바다로 이송되었다. 갖은 구타와 고문을 당한 이들은 반쯤 죽은 목숨이었지만 아직은 숨이 붙어 있었다. 청년들은 이들의 가슴에 돌을 메달았다. 자은분주소원들과 지방좌익 청년들이었다.
청년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챘지만 아무도 저항하지 않았다. 아니 저항하거나 몸부림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후 이들을 실은 돛단배가 노를 저었다. 30분이나 지났을까? 되돌아온 돛단배에 가슴에 돌을 메달은 이는 하나도 없었다.

이날 물고기 밥이 된 박후근(1888년생)은 젓갈 도매업과 선구점(배에서 쓰는 노, 닻, 키 따위의 기구를 파는 가게) 및 객주 운영 등으로 많은 재산을 축적한 자은면의 대표적인 부자이자 지주였다.

좌익들의 눈에 박후근이 자은면의 대표적인 반동으로 비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재판이라는 법적 절차를 통해 사법처리를 해야 한다. 더군다나 지주와 자산가라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빼앗는 행위는 전쟁범죄이다. 그런데 사실 박후근·김순심 부부가 남진창고 앞바다에서 물고기 밥이 된 것은 부자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들 박일만이 무안군청 학무계에 근무한 공무원이라는 점이 더 크게 작용했다. 그는 공무원이면서 대한청년단 활동을 했고, 6.25가 나자 청년방위대로 전장터에 자원입대했다가 그해 무안군에서 전사했다.

박일만 부모를 죽인 이들이 박일만이가 전쟁터에 참전한 것은 몰랐을 것이다. 다만 자식이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부모가 죽임을 당하는 광기의 시대였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