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인지 모를 이들이 우리 집에 다녀갔다
5월 1일은 노동절이다. 전세계 노동자들의 날, 벌써 134년에 이른 노동절, 오늘날 우리 사회는 노동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어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한다고 집에 빨간딱지가 붙고, 어떤 노동자는 ‘노동자’라고 불리지도 못한다. 저임금의 노동자는 초저임금을 강요받고, 그리고 또 어떤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했다고 받은 모욕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 우리는, 우리 사회는 어떻게 노동을 대하고 있나. 이 연재는 민주노총이 전하는 우리 사회 곳곳의 노동자들의 ‘일’ 이야기다. 우리의 일, 우리 일상의 이야기. <기자말>
[양경수 기자]
▲ 아파트 단지. 자료사진. |
ⓒ 연합뉴스 |
지난 주말 아내와 도란도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회사 동생이 우리 아파트로 이사 오고 싶어 알아보는 중인데, 경매에 나온 집이 있다고 하네".
"그거 우리 집은 아니지?"
"어? 응... 아니야... 아직은..."
우리의 대화는 멈췄고, 잠시 서먹한 침묵이 흘렀다. 평온한 주말 저녁의 일상은 순식간에 모골이 송연한 긴장으로 바뀌었다.
나는 10년 전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과정에서 5억여 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다. 연 12%의 이자와 함께. 그 후 계좌 압류, 급여 압류, 살림살이 경매 등을 거쳐 지금은 사는 집의 경매가 목전에 있다. 당장 2억 원을 변제하지 않으면 말 그대로 길바닥에 나앉을 상황이다.
드라마에서나 보고 말로만 들었던 빨간딱지, 그 실물을 영접했다. 진짜 빨간색이다.
어느 날 퇴근 후 아내와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거실 TV에 웬 종이가 하나 붙어있었다. '채무불이행으로 어쩌고...', '살림살이에 대한 경매가 저쩌고' 하는 내용이었다. 긴 한숨이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편으로 온 것을 아내가 일부러 붙여두었나' 생각했다. '아내가 나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일까? 뭘 이렇게까지.'
그런데 방에 들어갔던 아내가 갑자기 "여보 이게 뭐야?" 하며 날 불렀다. 안방 침대엔 지하철 티켓 크기만 한 빨간딱지가 붙어 있었다. 너무 놀랐다. 눈이 커지고, 가슴이 뛰었다. 그러고 보니 주방의 냉장고에도, 거실의 TV에도, 베란다의 세탁기에도, 컴퓨터에도, 심지어 자전거에도. 말로만 듣던 빨간딱지가 나도 모르는 새 집안 곳곳에 붙어 있었다.
나중에 들었다. 살림살이에 대한 압류는 진행하는 동안 충돌을 피하기 위해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진행된다고 한다. 누구인지 모를 이들이 주인 없는 집(경매가 목전이지만 아직 우리가 집주인이다) 문을 열고 들어와, 살림 곳곳을 둘러보고 들춰보며 가격을 매기고, 압류 딱지를 붙이고 조용히 돌아갔다. 이 모든 과정은 완전히 합법적이다.
그 뒤로 한 달 넘도록 아내는 집에 혼자 있지 못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다는(그것도 합법적으로!) 공포는 상상해 본 적 없는 두려움이었다. 내가 퇴근하고 귀가할 때까지 아내는 근처의 친구 집이나 카페에 머물며 나를 기다렸다. 그리고 함께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는 매일은 기분 나쁜 두려움이었다. 집에 또 누가 왔다 가지는 않았을까?
계속해서 이런 부담을 안고 살 순 없기 때문에, 살림살이에 대한 부부의 공동소유를 인정받아 매겨진 살림살이 가격의 절반만 우선 현금으로(압류 물품 경매 값은 현금만 받는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변제하고서야 두근거리는 퇴근길이 끝났다.
▲ 지난 3월 14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노조법 제2·3조 개정’ 재추진 촉구 기자회견'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된 일명 노란봉투법 개정안을 총선시 주요 정당의 핵심공약에 반영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
ⓒ 이정민 |
노동자들의 투쟁에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고통을 주면 안 된다는 노조법 개정안, 일명 '노란봉투법'이 천신만고 끝에 어렵게 21대 국회 문턱을 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윤석열 대통령은 가볍게 거부권을 행사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얼마든지 탄압할 수 있다!'라는 대통령의 의지. 손배가압류의 고통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노동자들이 숱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여전히 고통이 현재진행형이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누군가는 우스갯소리처럼 재산을 아내 명의로 돌리고 위장 이혼을 하라고 조언했다. 계좌 압류로 아내의 통장과 체크카드를 사용하니 일거수일투족이 아내에게 보고된다며 앓는 소리를 한 적도 있다. 가끔 "부채도 자산이니 난 수억 원의 재력가"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그러나 조언은 때로 비수가 되어 꽂히고, 앓는 소리도 너스레도 겉으론 드러낼 수 없는 자괴감이 된다.
노사관계에서 사용자는 '갑'이다. 갑과 을의 압도적인 힘 차이에 맞서기 위해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한다. 회사에서 부당한 일이 발생하면 투쟁을 통해 요구를 관철하고자 한다. 손배가압류는 감히 '갑'인 사장님들에게 덤비는 괘씸한 '을'들을 겁박하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무기다.
회사가 실제로 손해배상소송을 진행하지 않더라도, 노사 간의 협상 테이블에서 슬쩍 '손배'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그 효과는 대단하다. 회사가 건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되고 판결까지 내려지면 임금 인상이나 처우 개선 같은 애초의 요구는 사라지고 손배 해결에 모든 것을 걸게 된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대형 로펌의 변호사들을 대동한 사측에 비해 노동자들은 길고 긴 소송 과정을 이어나가는 것만으로도 고역이다. 그러니 사용자로선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산으로 소송을 하고 본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든, 손배 소송은 사용자에게 매우 위력적이고 매력적인 무기, 노동자에겐 넘사벽이자 블랙홀 같은 절망이다.
때문에 노조법 2·3조 개정은 노동자들에겐 가장 시급한 문제다. 22대 국회가 열리면 가장 먼저 개정을 추진해야 한다. 민주노총이 지난 총선에서 가장 핵심적인 정책요구로 제시한 것도 그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투쟁한 대가로 470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 중인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도, 국외 자본의 '먹튀'와 그에 따른 해고를 막겠다고 투쟁 중인 한국옵티칼의 노동자들도 손배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노조법 2·3조 개정은 그 노동자들에게, 부당한 정리해고와 저임금, 초장시간 노동과 산업재해, 직장 내 괴롭힘과 싸우고 있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불법파견 노동자를 정규직화하라고 외쳤다가 집에 빨간딱지가 붙은 나에게도 생명과 삶의 문제다.
사실 모든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할 권리를 갖는 것, 노동조합의 정당한 활동을 했다고 천문학적인 손해배상과 가압류를 당하지 않는 것을 정하는 법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 법의 개정을 가로막는 건 윤석열 대통령과 그 일당들,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를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는 나쁜 기업인들뿐이다.
국민의 대부분인 우리 노동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노조법 2·3조를 얼마든지 개정할 수 있다. 그저 윤석열 대통령과 그 일당들,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를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는 나쁜 기업인들만 몰아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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