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와 결혼한 의사…그녀는 가슴으로 진료한다 [내 인생의 오브제]
이런 예민한 상황에서 4월 초 한 의료계 원로의 편지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길여 가천대 총장. 의사 출신으로 대학을 설립한 그녀는 의대 증원에 반대하며 수업을 거부하는 후학들에게 ‘사랑하고 자랑스러운 가천의 아들, 딸들에게’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올렸다. 감성적이지만 결기가 묻어나는 글이었다.
1958년 인천에 빨간 벽돌로 지은 3층짜리 병원을 개업한 이 총장은 자신의 학창 시절을 회고한다. 6·25 전쟁통에도 책을 놓지 않았던 이길여. 그녀는 고향 뒷산 방공호용 토굴에서 공부를 했다. 낮에는 희미하게 스며드는 햇빛으로, 밤에는 촛불을 켜고. 그러기에 후학들에게 “의사라는 직업을 택한 당신들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쓴소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총장은 좋은 의사가 돼 많은 환자를 살리기 위해 독하게 공부했고 그런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 결국 그 꿈을 실현했다.
그녀를 상징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게 ‘따뜻한 청진기’다. 처음 환자를 진료했을 때다. 환자들이 청진기의 차가운 감촉이 살에 닿자 흠칫 놀라는 것이었다. 산모는 특히 그랬다. 산모가 놀란다는 건 태아가 놀란다는 것. 태아에게 좋을 리가 없다. 이를 예사롭지 않게 여긴 이길여. 어떻게 하면 청진기를 따뜻하게 할까 고민하다 본인의 체온으로 덥히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가슴에 품은 청진기’가 탄생한다. 또 진료를 보는 그녀 옆에는 늘 대야에 뜨거운 소독물을 준비했다. 고무장갑을 데우기 위한 것이었다. 자궁 안을 손가락으로 내진할 때 놀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의사 이길여를 상징하는 일화들은 숱하게 많다. 몰려드는 환자로 하루 24시간이 부족했던 그 시절. 그녀는 의자에 바퀴를 달아 발로 박차가며 진찰대에 누워 있는 환자를 치료했다. 의사 기다리는 시간 줄이고 환자 한 명이라도 더 치료하기 위해. 세운상가에서 바퀴를 사서 직접 의자에 붙였다. 이 밖에도 산모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끓인 미역국은 이길여산부인과를 맛집으로 만들었고 동네 병원에서 처음 도입한 엘리베이터는 인천의 명물이 됐다. 이런 작은 배려들이 하나둘 쌓여 인천의 작은 산부인과는 국내 굴지의 종합병원으로 성장했고 그걸 발판으로 가천대까지 세우게 된다.
4년 전인 2020년 8월. 매일경제신문과 한국경영학회는 대한민국 기업가 명예의 전당에 이길여 총장을 헌액한다. 이병철, 정주영 회장 등을 이은 11번째 주인공. 요새 젊은이들 용어로 경영학을 1도 공부하지 않은 분을 기업가 명예의 전당에 모신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그녀를 위대한 기업가로 본 건 바로 고객 만족 경영이었다. 경영의 본질을 본능적으로 꿰뚫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직 환자만 있었다. 미국 유학 시절. 그녀에게도 사랑이 있었다. 얼마간의 가슴 설레는 연애를 하다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서 프러포즈를 받았다. 그녀가 그 남자에게 한 말. “나는 결혼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환자와 결혼한 몸이에요.” 그게 그 남자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었다.
후학들에게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고자 하는 이 총장. 그녀는 젊은 수련의들에게 늘 이렇게 묻는다. “선생님은 환자를 가슴으로 대하고 있나요?”라고. 그리고 가천의대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생들의 목에 ‘청진기’를 걸어준다. 그 차디찬 청진기가 가천의대 제자들의 품속에서 따뜻하게 바뀌어 히포크라테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손현덕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7호 (2024.05.01~2024.05.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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