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수의 책으로 읽는 세계]민주주의는 선거 이후에 완성된다
승자 독식 '민주주의의 덫' 경고
"제한 없는 다수결은 위험"
국회의원 선거가 야당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대화를 통한 양보와 타협은 정치의 기본 원리이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지난 두 해 동안 우리는 불통과 대립, 적대와 투쟁의 무한 반복을 보았을 뿐이다. 누적된 사회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삶의 고통이 지속될 때 시민들 불만이 권력을 쥔 여당을 향하는 건 당연하다.
특히 그 권력이 선거 과정에서 삼무(三無)의 오만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기자를 앞에 두고 청와대 수석이 ‘회칼’을 운운함으로써 군사독재 시절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 짓은 무도(無道)했다. 시민의 자부이자 성취인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것처럼 여겨졌다. 해병대 수사 외압 의혹 사건의 핵심 당사자를 호주 대사로 ‘밀수출’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 것은 무법(無法)했다. 권력이 얼마든지 법을 농단할 수 있음을 드러냈다고 느껴졌다. 방송에서 ‘대파’를 들고 낮은 물가를 운운함으로써 대통령이 서민들 삶과 괴리되어 있음을 보여준 건 무식(無識)했다. 앞으로 유튜브 방송에선 정기적으로 물가 강좌를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승패의 저울추를 든 중도층이 무능에 오만하기까지 한 현 정권의 행태에 마음을 돌린 큰 이유다.
‘정치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밴 앤셀 옥스퍼드대 교수는 정치를 "필연적인 불일치에 대처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함께 힘을 모아 이루려 한다면 반드시 정치가 필요하다. 정치는 개인적인 이기심과 집단의 목표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공동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방식이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서로 약속하는 방식이며 기후 변화, 전쟁, 전염병 등 인류 전체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방식이다.
오늘날 인류는 갈등을 조정하고 분열을 봉합하며 사회적 약속을 창출하는 여러 가지 시스템 중에서 민주주의, 시민들이 스스로 지도자를 선택하고 갈아치우는 체제를 가장 선호한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민주주의는 정파적 대립에 따른 증오와 갈등, 눈앞의 달콤함과 앞날의 고통을 맞바꾸는 포퓰리즘의 유혹, 선거를 통한 권위주의적 독재자의 선출 등으로 흔들리는 중이다.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자유가 억압되며 평등이 무너지는 비극이 흔해진 것이다. 저자는 이를 ‘민주주의의 덫’이라고 부른다.
민주주의의 덫은 다수의 일시적 결정이 모든 것이라고 착각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정치가들은 흔히 ‘국민의 뜻’을 이야기하나, ‘국민의 뜻’ 같은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선거는 판결과 다르다. 사람들은 선거 결과를 존중할 순 있어도 그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으며, 정책 결정 과정에서 다른 제안을 내놓음으로써 의사결정을 바꾸려 한다.
따라서 작은 차이로 선거에서 이겼다고 해서 모든 일을 제 뜻대로 밀어붙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건 분열과 파국을 가져올 뿐이다. 이러한 착각은 민주주의를 "승자와 패자 사이의 소리 지르기 시합"으로 타락시키고, 친구와 이웃을 원수로 만들며 사회를 양극화한다. 지난 두 해 동안 우리가 끝없이 겪어온 일이다.
앤셀은 ‘민주주의의 덫’에서 벗어나려면 "선거의 승자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제도와 규범을 통해 민주주의를 길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제한 없는 다수결은 위험하다. 선거 결과가 모든 정책을 좌우하는 ‘선거적 전제주의’는 민주주의와 아무 상관 없다. 아돌프 히틀러는 선거를 통해 집권해 자유를 억압하고 의회를 폐쇄했으며 인종주의와 파시즘, 전쟁과 학살을 정책으로 삼았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은 자신이 "자유를 제약하는 민주주의를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아주 작은 차이로 선거에서 이긴 승자가 협소한 지지 기반을 가리기 위해 압도적 승리를 거둔 것처럼 폭압적으로 통치할 때 사회는 분열된다. 지난 대통령 선거의 승자는 고작 0.7%만 이겼을 뿐이고, 이번 국회의원 선거의 승자는 불과 5.4% 더 득표했을 뿐이다. 승자의 독식과 폭주를 억제하는 지혜를 발휘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의 덫이 다시 우리 사회를 잡아먹을 수 있다.
민주주의의 덫이 작동하지 못하게 하려면 언론, 감사원, 중앙은행, 신문, 노조 등이 다수결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독립 기관들이 정부 활동을 억제함으로써 ‘국민의 뜻’을 제약해야 하고, 시민 모임을 활성화함으로써 주요 정책 과정에서 양측에서 목소리가 가장 크고 극단적인 사람들이 전체 의사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고 앤셀은 주장한다. 보통 시민들이 전문가들 도움을 받아 정책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숙고를 통해 자기 의견을 조정하는 숙의 민주주의가 대안이라는 뜻이다. 국민연금이나 의료 개혁 같은 정책도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갈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도덕적인 선악 게임이 아니라 이해와 갈등이 충돌하는 투쟁의 장으로 바라보았다. "공화국을 통치하는 자들에게 유익한 교훈은 국가의 불화와 파쟁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다른 이들의 고통을 통해 현명해짐으로써 그들은 국가 통합을 유지하는 법을 배운다."(‘피렌체의 역사’ ) 그에 따르면 정치란 신의 뜻이 실현되는 심판이나 권선징악의 과정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분열이 반복되는 가운데 어떻게든 통합과 번영을 이룩해가는 갈지자 과정에 가깝다. 사람들이 산산이 흩어져 대립하고 투쟁하기만 하면 의견 충돌은 "가장 위대하고 가장 강력한 국가마저 파괴"하는 고통으로 이어지고, "내부 통합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 체제"를 이루면 국가에 놀라운 역동성을 불어넣고 개인의 잠재력을 개화하는 동력이 된다.
좋은 정치는 필연적 불일치를 넘어서 공동체 전체가 함께 문제 해결에 복무하도록 이끈다. 지도자들이 ‘우리 편 중독’에 빠져서 정치를 승자독식이 벌어지는 적대적 투쟁의 장으로만 여길 때, 정치는 공동체 파괴를 부르는 파멸 기계가 된다. 반대로 역사를 교훈 삼아 고통을 피하는 통합의 지혜를 앞세울 때 정치는 성공적으로 작동한다. 선거가 끝났다. 민주주의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 이후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완성된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는 지혜의 정치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장은수 출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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