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3년 협치' 운명 걸렸다…尹∙이재명 오늘 영수회담
매듭이 너무 꼬였을 땐 끊고 다시 묶는 게 나을 수 있다. 정치권에서도 종종 지도자들이 가위질을 했다. 1987년 6월 24일 전두환 대통령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만났다. 당시 김 총재는 회담 결렬을 선언했으나, 닷새 뒤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ㆍ29선언’이 나왔다. 2000년 6월 24일에도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만나 의약분업으로 촉발한 의료대란의 출구를 열었다. 후대가 의미 있게 평가하는 영수회담이다.
수년간 여야가 극한 대립을 반복한 정치 실종의 세태 속에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9일 만난다. 두 사람의 첫 양자 회담이자,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단독으로 만나는 건 2018년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이후 6년 만이다.
오후 2시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차를 마시며 진행될 이번 회담은 양측 참모 3명씩 배석하는 ‘4+4’ 형식이다. 모두 발언이 끝난 뒤 비공개로 회담을 진행한다. 논의가 길어지더라도 시간제한을 안 두기로 했다. 의제도 시간도 제약 없는 ‘열린 회담’이라 성과를 예단하기 어렵지만, 이번 회담이 윤석열 정부 남은 3년의 가늠자가 될 거라는 전망은 많다. 4ㆍ10총선에서 민주당이 175석(비례정당 포함)을 거머쥐며, 윤석열 정부는 남은 임기 내내 여소야대 국회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만남 자체는 성과라는 게 정치권 안팎의 중론이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 모두 한 차례씩 양보하면서 극적 요소도 갖췄다. 윤 대통령이 19일 이 대표에게 전화해 “만나자”며 물꼬를 텄고, 이 대표도 “가급적 빨리 만나자“고 화답했다. 실무진 사이에서 의제를 놓고 일주일간 힘겨루기만 반복하자 이번엔 이 대표가 26일 “다 접어두고 만나자”고 했고, 대통령실이 곧장 환영 의사를 밝히면서 시간ㆍ장소가 일사천리로 정해졌다. 외형상 일진일퇴한 셈으로, 정치권에선 “윤 대통령은 야당 대표를 국정 파트너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이 대표는 의제 제한 없이 회담에 응한다는 점에서 서로 마이너스 될 게 없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제 관건은 만남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느냐다. 회담 성사 과정에서 양측은 모두 민생 이슈에 무게를 뒀다. 윤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민생에 있어서는 준비를 철저히 해 실질적인 회담이 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 대표도 “민생 골든 타임이 시급해 더는 아까운 시간을 버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다만, 구체적인 방법론에선 온도차가 크다. 대통령실은 회담 성격을 “민생ㆍ경제 회복을 위한 국회의 협조를 구하는 자리”(고위관계자)라고 규정한다. 고환율 등에 따른 경제 해법과 의료공백 장기화 같은 현안을 최우선으로 논의하겠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1인당 25만원의 민생회복지원금 같은 구체적인 공약과 연금 개혁 같은 거시 과제도 논의하자는 입장이다. 윤 대통령의 국정 기조 전환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도 강하다. 이 대표 측 관계자는 “총선 민심은 경제를 살리고, 국정운영 기조를 바꾸라는 것”이라며 “실무회담에서 얘기를 나눴으니 윤 대통령이 답할 차례”라고 말했다.
민생과 연계된 쟁점 법안에 대해서도 “제1야당 대표가 대통령과 만나서 법안을 놓고 담판을 짓겠다는 발상 자체가 반헌법적”(핵심 관계자)이라는 대통령실과 “영수회담에서 만나서 손잡고 악수하고 끝나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박성준 수석대변인)는 민주당의 입장이 갈린다.
특히, 양측 지지층이 민감해할 이슈는 난제다. 야권이 요구해 온 ‘채상병 특검법’과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방송법ㆍ양곡관리법이 의제로 오를 경우 격론이 오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채상병 특검법은 대통령실을 직접 겨냥한다는 점에서 차담 분위기를 급격히 얼어붙게 할 수 있다. 대통령실 핵심 참모는 “국민이 원하는 것은 ‘그만 싸우고 민생을 살펴달라’는 것인데, 민생과 상관없는 정쟁성 이슈를 잔뜩 테이블에 올리는 건 민심 요구에 부응하는 행동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 대표 측에선 “모두 발언 내용은 미리 공개할 수 없다”며 말을 아꼈지만, 민주당에선 “이 대표가 총선 민심을 다 전달하고 올 수밖에 없는 만큼, 채상병 특검법도 논의까진 아니어도 의견을 전해야 한다”(친명계 중진)는 의견이 많다.
회담이 무사히 마쳤을 경우의 성과물 내지 증거물이 될 공동 합의문 작성에 대해서도 양측의 입장이 다르다. 대통령실 핵심관계자는 “각자가 따로 발표하는 형식이더라도 최소한 ‘민생을 위한 협치를 하자’는 정도의 선언적 문구 정도엔 합의해야 하지 않겠나”라며 “적절한 수준의 합의문은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반면, 박성준 민주당 대변인은 “의제 채택을 못 했으니 (발표문은) ‘어떤 부분에 대한 입장을 전달했다’ 그 정도가 되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이 대표 측 관계자 역시 “합의문은 전혀 얘기된 바가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민주당이 바라는 건 양자 회담의 정례화다. 친명계 중진 의원은 “이번 회담의 성과는 윤 대통령에 달려 있겠지만, 최소한 ‘정례화하자’는 합의만 해도 커다란 의미일 것”이라고 말했다. 거꾸로 대통령실에선 “대통령 스타일상 여당을 패싱하고 야당 대표와의 회담을 정례화하는 건 부담스러울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각자 상대방이 싫어하는 얘기만 하고 듣고 싶은 얘기만 들으려 하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없다”며 “국민이 걱정하는 경제위기와 의료대란 해법부터 시작해, 가능하면 국무총리 추천도 주고받고 향후 추가적인 대화까지 열어놓으면 성공적인 회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현석·현일훈·성지원 oh.hyunseok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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