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선의와 국회의 무성의 [최현철의 시시각각]
헌법재판소가 위헌이라고 판단하면 해당 조항의 효력은 즉시 사라진다. 그런데 헌재는 위헌인 조항을 유지하면서 새 법을 만들고 준비할 시간을 주기도 한다. 그 법에 기초한 사회 질서가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자는 배려에서 나온 게 헌법불합치 결정이다. 짧게는 6개월, 넉넉하게 주면 2년도 부여한다. 그럼 시간 끌 것 없이 서둘러 준비하는 게 상식일 텐데, 우리 국회는 딴판이다. 개정 시한을 넘기는 게 다반사다.
현재 가장 심각한 게 낙태 관련 법이다. 헌재는 2019년 4월 형법의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정을 했다. 2020년 말까지 1년 반의 개정 시한을 줬다. 그러나 5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법은 효력이 없어졌는데 새 법이 없으니 정부로서는 낙태에 건강보험을 적용할 수 있을지, 낙태약을 허용할지 등 관련 규정을 정비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임신 중단을 해야 할 여성들은 불법 시술, 불법 약 구매로 내몰리고 있다.
2022년 12월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은 대통령 관저 100m 이내 시위금지 조항(집시법 제11조 3호)의 개정 시한은 이제 한 달 남았다. 지금도 대통령 집무실을 관저로 볼 수 있느냐를 놓고 경찰과 시위단체 간 소송이 빗발치는데, 한 달 뒤면 이마저도 의미가 없어진다. 집무실이 아니라 관저 코앞에서 시위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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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법불합치 법률 14건 개정 안 돼
위헌조항 고쳐라 시간 줘도 방치
국회, 유류분 개정은 시한 지켜야
」
지난해 8월 온 나라가 몸살을 앓은 현수막 전쟁도 헌법불합치 판정이 난 법률을 정비하지 않은 국회 탓이 컸다. 2022년 7월 헌재는 선거 180일 전부터 낙선·당선을 겨냥한 현수막을 금지하는 공직선거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단을 내렸다. 개정 시한은 지난해 7월 말. 그런데 국회는 이 법은 놔두고 엉뚱한 법을 건드렸다. 현수막을 걸 때 지자체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정당 현수막은 예외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도록 옥외광고물법을 개정한 것이다. 게다가 7월 말까지 선거법 개정도 못 했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법 개정을 앞두고 여야는 자제는커녕 경쟁적으로 더 자극적인 현수막을 내걸었다. 도로변 막말 대잔치는 여야가 개정안을 통과시킨 8월 말이 돼서야 간신히 진정됐다.
국회 사무처에 따르면 헌법불합치 결정이 났지만 개정을 못 한 법률이 14건에 이른다. 이 중 4건은 이미 개정 시한을 넘겼고, 이번 국회 회기가 끝나는 다음 달 21일이 시한인 법률이 5개다. 없는 법도 만들겠다며 날치기며 의원 꿔주기, 패스트트랙, 단독 의결 등 온갖 편법과 갈등을 감수해 온 국회지만 정말 시급한 법 개정은 나 몰라라 한다.
지난주 헌법재판소는 고인의 유언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유족이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유산 비율을 의미하는 유류분 조항(민법 1112조, 1118조)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이 중 형제자매에 대해 법정상속분의 3분의 1을 보장하는 조항은 단순 위헌 결정으로 곧바로 효력이 사라졌다. 반면에 부모와 자녀·배우자 몫 유류분은 내년 말까지 효력을 남겨두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했다. 패륜 가족에게 유산이 가지 않도록, 피상속인을 극진히 돌본 사람은 유산을 더 받을 수 있도록 법 조항을 정비하라는 의미다.
패륜 가족에 대한 상속 문제는 사라졌던 엄마가 딸이 죽자 20년 만에 나타나 상속분을 주장한 ‘구하라 사건(2019년)’ 이후 뜨거운 감자였다. 20대 국회에서 이를 방지하자는 취지의 '구하라법'이 발의됐지만, 회기 만료로 폐기됐다. 이번 국회에서 다시 발의된 법도 한 달 뒤면 같은 운명이 될 판이다. 이처럼 국회가 제 역할을 못 하니 헌법재판소가 나서 개정을 강제한 셈이다.
상속 문제는 현수막이나 집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대상자가 많다. 상속 지분에 대한 규정 일부가 위헌이라는 판단이 나왔으니 앞으로 분쟁과 소송은 더 늘어날 것이다. 법원은 개정법의 취지를 반영하기 위해 재판을 멈출 가능성이 크다. 온 나라가 상속 문제로 지지고 볶을 개연성이 커졌는데, 과연 국회는 개정 시한이라도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다.
최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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