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사랑 없는 세상이 디폴트, 그래서 매번 기뻐해야지

이마루 2024. 4. 2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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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정규 앨범을 발표한 김사월이, 숏커트에 남성용 정장 차림으로 재킷을 찍은 이유
김사월 앨범커버
「 사랑 없는 세상이 디폴트, 그래서 매번 기뻐해야지 」
사람 앞에서 이야기할 때 폭소에 가까운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참기 힘들 때가 있었다. 발화하는 자신이 못 미덥고, 당황스러워서 그 마음을 무마하기 위해 나왔던 웃음. 하지만 이런 미숙함은 ‘수줍다’ ‘귀엽다’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듯했다. ‘참한 아가씨’처럼 비쳐질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마음 놓고 자신을 비웃을 수 있었던 걸까? 스스로 우습지 않게 느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나는 ‘좋아하고’ 귀여운 남자 가수는 ‘사랑한다’는 걸 느낄 때 이상하게 패배한 기분이 든다. 그냥 다른 것일 뿐인데, 때때로 내가 가진 ‘페미니즘’ ‘기집애’ 같은 기질이 미웠다.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청자들은 나를 계속 사랑했을까? 가장 기본적인 초기 설정값을 의미하는 ‘디폴트(Default)’, 그 ‘디폴트’가 될 수 없다는 내 정체성과 비애를 담은 이야기를 기반으로 새 노래 ‘디폴트’ 초안을 만들었다. 자기연민과 자기파괴가 동시에 뒤섞인 생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노래를 만든 뒤 그 감정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니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우스운 일처럼 느껴졌다. 뒤집어 생각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각자가 바라는 공평함이 있고, 결국 자기 자신으로서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이다

지난 3월에 발매한 새 앨범 커버 사진 속의 나는 짧은 머리와 커다란 남성용 정장을 입은 모습이다. 갑작스러운 스타일 변화를 반가워해주는 청자들의 모습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개인적이고, 무척이나 꼬인 마음에서 비롯된, 왜 이런 모습으로 커버를 남겨야만 했는지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면서도 이 모습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저항적으로 굴고 싶었지만 ‘못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봐 내심 걱정했다. 한국 여성이 자신의 외모에 대해 가지는 영원한 굴레. “기뻐했다가 실망했다가 흔들리는 일은 너무 힘드니까요. 지금은 사랑받아서 ‘다행’인 거죠.” 이 말을 들은 상담 선생님은 ‘다행이다’라는 표현을 ‘기쁘다’라고 표현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unsplash

음악가 A가 만들고 그의 친구들이 비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온라인 다이어리 모임이 있다. 일주일 혹은 한 달 동안 자신이 잘한 점, 힘들었지만 배운 점, 다음에 집중할 것을 작성해 돌아가며 발표한다. 참여자들은 발화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느낀 점을 말한다. 이 놀라운 모임은 일 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데, 자신을 좀 더 긍정할 수 있는 힌트를 서로에게서 얻는다. 자신의 성취에는 엄격한 사람이 타인에게는 너그럽게 잘했다고 말해 주는 장면을 매주 목격하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갖는 방어기제와 완벽함을 향한 갈망, 그렇지 못할 때의 불안, 자책, 회피.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누구나 이 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자신을 노려보던 마음이 슬쩍 풀린다. 3월에 잘한 일을 발표하며 나는 “4년 동안 준비해 온 앨범을 19일에 발표했고요…” 하고 말하다가 덜컥 눈물이 났다. “…그걸 홍보하기 위해 3월 내내 열심히 준비했어요. 눈물이 나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이 다 지나가기 때문이에요. 너무 행복해서 놓기 싫었던 것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도 결국 지나간다는 것이 너무 허망해요.” 말하니 너무 슬픈데 슬픈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화면 속의 A는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벌겋게 눈물을 흘리며 나도 화면을 보며 웃었다. A가 말해 주었다. “그런 마음을 하나하나 다 느낀다는 것이 좋고, 사월이 슬픔도 기쁨도 모두 흘려보낼 수 있어서 또 좋네요.” A가 그렇게 말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있었기에 말랑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다. 문득 알았다. 앨범을 내고 나서야 내 마음이 ‘디폴트’가 될 수 있었다는 걸. 그건 내 힘으로 완성하는 게 아니고 삶에 맡겨야 했다는 걸.

믿지 못하고 흘려보낸 사랑이 너무 아쉽고 귀하게 느껴질 때, 그만큼의 낭비를 하고 나서야 어리석게도 사랑이 지나갔다는 것을 안다. 제대로 받을 줄도 모르는 나에게 어찌 손을 내밀어주었을까. 줘도 못 받는 나를 뻔히 알면서도 던져준 사랑들을 이제야 실감한다. 나는 충분히 사랑받고 있었다. 준 만큼 오지 않고, 온 것과 상관없이 보내주는 비합리적인 거래. 모두 내 맘 같지 않지만, 그럼에도 다들 나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이제 좀 알 듯하다. 먼저 솔직해지면 상대도 나에게 더 큰 솔직함을 보여준다는 사실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사랑받고 싶다고 미숙하고 너무 솔직한 말을 해버렸다. 그러자 겨우 느껴진다. 사랑은 느낌, 사랑은 믿음, 마치 행복처럼 어느 순간 때가 되면 내릴 빗방울. 사랑 없는 세상이 디폴트, 그러니까 사랑의 순간 매번 기뻐해야지.

김사월
어느덧 네 번째 정규 앨범을 발표한 싱어송라이터. 에세이 〈사랑하는 미움들〉을 펴냈다. 잘 웃고 잘 웃다가 뭔가를 기록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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